반환(盤桓) 홍천경(洪千璟) 선생의 생애 (가장;家狀)
(반항공 문중에서 2008년 발간한 반환선생유집 국역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선생은 가정 계축(1553년 명중8년8년)년에 나주 금안동 수각리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은 천품과 기질이 순수하고 재능과 그릇이 다른 사람과 달라 탁월하여 '선풍도골'이라 칭하였다.
아버지 참판공의 성품이 엄숙하여 철저하게 가르쳤으며 선생은 어린 소년 시절부터 행현에서 강습을 받았다.
글을 읽고 암송하면서 알지 못하거나 의심스러우면 바로 선생님께 물어 알아냈으며 용기 또한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점점 자라면서 태헌 고 선생과 고봉 기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율곡 이이(李珥)선생은 도학이 높아 빛나고 해서 에서 크게 강장을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부모를 떠나 그 곳으로 도보로 공부를 하러 갔다.
도의와 성리학을 배웠으며 그 학문의 길을 믿지 않고서는 돈독한 선행을 즐겨하지 않겠으며 좋아하는 지성이 아니고서 어찌 능히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천리 길이 멀다고 하지 않겠는가?
율곡선생은 그 기질과 호협 상쾌한 모습의 늠름함이 남달리 초월하였으며 그 그릇이 다름을 보았다.
하루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덕망이 밝아 시기하고 질투한 자가 있어 나쁜 마음을 품고 은근히 거짓으로 선생에게 꾸며 말하고 부모가 알게 되어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내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감히 내치지 않았으며 피부로 느끼고 하소연함을 극복했다.
가정 통신이 먼저 스승에게 도착했고 그 글을 본인을 불러 전하였다.
그 글 가운데 네가 해서 로 떠난 뒤 마음속으로 어찌 되었는지 궁금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어진 선생을 만나 학문을 배우니 모름지기 실지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이 선생은 문하의 제자를 불러 말하되 홍모의 가서는 이와 같다며 비단 같은 아름다운 학덕을 밝혔던 전일의 말은 어찌 되었는가? 선생과의 인연으로 스스로 대현의 문하에서 학업을 연마하며 덕성을 양육(함양)하고 밝은 의리를 강습 받았고 인륜의 학문을 실천하여 마침내 크게 성취하였다. 선생은 약관 이십에 일찍이 풍요로운 잔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소년으로 말석에서 부터 상좌 재상의 자리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풍류 호남으로 절묘한지라 한 기생이 술잔을 들고서 마음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선생 앞으로 나아가서니 앞에 있는 제상이 말하기를 진실로 제일의 풍류남자이니 그렇게 하라고 명하였다.
기생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에 네가 홍수재를 모시되 여의치 못하면 중죄로 다스리리라 하였다.
이때 허균(許筠)이 연소하고 재능과 기예가 있다고 자부하였으나 그 풍류를 독점한 선생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니 허균이 시기하는 마음이 싹텃다. 기생은 결과적으로 선생을 모시고자하여 하루 밤을 문밖에 서 있었으나 마침내 열어 주지 않으니 방 만보고 기생은 이어 소리 내어 울고 갔다 한다.
선생의 바른 자세와 위력에 의욕을 상실하고 눈물의호소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율곡 선생은 선생의 시문을 발췌하여 뽑아 취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홍모의 문장이라 하였고, 이 사람은 장차 마땅히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크게 밝힐 것이며 매사에 급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선생은 믿을 수 있는 스승의 문인으로 말이 적고 남의 말에 개입하여 의심받는 행위는 없을 것이다.
선생은 율곡 선생에 대하여 예의범절과 의식에 있어 공자의 제자중 하나인 자공과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 정개청이 본 고을 교수가 되어 강론하니 선생은 개청의 강론하는 무리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고 빙자하여 나아가지 않으니 개청이 본 고을에 촉탁하여 선생을 욕되게 하였다.
기축년(1589년 선조22년) 정 여립의 모반 옥사에 정개청은 그의 혈당원으로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최북단으로 투입하였으니 선생의 밝은 견해는 확실하였으며 그의 몸가짐도 이와 같았다.
이로써 당시의 흐름으로 보아 매우 우려됨을 보고 송강과 더불어 논의한바 있었다.
그때 반도들의 무고함으로 송강은 북쪽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고 선생도 투옥되었었다.
이러한 상황과 까닭을 허목의 기언집에 이르기를 조정의 논의인즉 정철이 주장하는 사론이며 홍천경이 주장한 바로서 또한 말하기를 정승 정철이 호남선비 홍천경에 부탁하여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기축(1589년 선조22년)년에 정 여립의 모반 사건에 대한 옥사에 또한 저들은 이른바 조경록(照鏡錄)에 거짓으로 꾸며진 선생과 송강에 대한 기록이 끝이 없이 많은데 이것을 보아도 시기와 질투심이 얼마나 많았으며 거짓이 심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사암 박순(朴淳), 황강 김계휘(金繼輝), 심 청양 등 재현들의 세력들이 부식되고 기틀이 마련되어 공론으로 함께 구제할 때 일이 비록 저들의 무리에 배척당한다 하여도 선생의 도덕관은 더욱 빛날 것이다.
임진(1592년 선조25년)왜란에 건제 김천일(:金千鎰)장군 휘하 종사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의곡을 모아 수송했으며 강화도를 지켰고 기획과 방약에 많은 기여를 했다.
뜻을 함께 한 사람들과 더불어 제공들은 의곡 삼천 석을 배로 운반하여 보낸 사실이 성취헌(醒醉軒) 기공(奇公)의 일기 속에 기록되어 있다.
때는 임금이 임시로 의주(義州 : 龍灣)에 머물고 있을 때 왕세자는 숙천에 있었는데 왜적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명령이 하달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선생은상소문을 받들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면 움직이여 적의소굴을 뚫고 행재소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바로 선조 대왕을 알현하고 왕세자 남하의 소를 올리면서 국내 사정을 보고하니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바로 별좌 직장(直長)으로 제수 하였으니 흐뭇한 영광이라 하겠다.
이때 적신 홍노는 또 흉악한 거짓 상소로 왕세자는 부계 성혼(成渾)과 더불어 협모하여 조정을 분열 시키고 왕세자의 처지를 난처하게 하고 궁궐 밖에서 머물게 하였다.
유배지 에서 머물고 있는 선생은 홀로 항거하여 홍노의 불의를 규탄하는 항소를 의주 행 재소 임금께 올려 그 잘못된 의혹을 풀게 되어 그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임진 일기를 보면 홍군옥(洪群玉 반환공의 字)이 어제 음만으로 부터 오니 함성과 동시 명나라 장수가 와서 진지를 정재하고 호령하니 밝고 엄숙하였으며 파죽 양란지세로 왕래한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천리 밖에서 왔으니 그 공훈이 공훈이 심히 많았다.
임금은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총애하며 작록을 하사라고 공신에게 주는 단서 철권을 내리었다.
정유 재란(1597년 선조30년)에 도원수 권율 장군(權慄將軍)의 예하에서 종사관으로 격문을 광고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의곡을 마련하고자 호소한 것은 공의 응급조치의 한 수단과 방법이었다.
1598년 무술 년 12월 12일 용림습정자 중음을 도원수에 봉정할 때 왜구들이 많은 병력으로 남쪽 변방을 침입할 때 선생은 도원수와 함께 남쪽을 왕래하며 순찰하고 침입을 방어하였다.
제주도로 건너가는 도중 쾌승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기해(1599년 선조32년) 초봄인 1월 IS일 추자도에서 유숙하는데 제주 목사인 이상국 경록의 부음을 듣고 만사를 지었다.
선생은 나이 49세로 신축년에 두 번째의 시마시에 뽑혔다. (갑오년으로부터 신축년 까지는 머물고 풀린 한때) 조죽음(趙竹陰) 희일(希逸)과 더불어 막역한 벗으로 함께 회시장(會試場 초시 합격 후 두 번째로 보이던 科擧試驗)에 들어가 응시하여 급제하니 조희일이 묻기를 군옥(群玉 : 반환공의 字임)은 어느 문체로 글을 짓고자 했느냐고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적벽부체로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죽음(竹陰)이 말하기를 장원 급제를 나에게 양보하고 그대는 차위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그렇게 하라 하는·미담이 있어 그때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허균의 시기와 질투의 사나운 마음을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허균의 시문을 일찍이 모았는데 마치 부채나 키로 까불고 휘두른 듯 함을 느끼게 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매양 마땅히 시관으로 신중을 기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뽑았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작문하는데 항상 방황하게 했으며 두려워하여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한강을 건너면서 시를 남겼다.
만력 37년 기유(1609년 광채원년) 증광시(增廣試 나라에서 경사가 있을때시행)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금을 알현했으며 선생은 나이 57세로 비록 늦게 성취했으나 대성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선생은 그날을 회고하며 말했다.
율곡선생은 그날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급제한 명산에 현주 조찬한(趙纘韓) 계곡 장유(張維) 백강 이경여(李敬輿) 등은 밖으로 저명한 어진이들로 장유는 문장이 새롭고 풍족하며 독보적이며 모두가 명현들로 유명한데 선생은 그 가운데서 첫머리를 차지하여 장원급제 하였는데 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리하여 성균관 전적을 역임한 뒤 나주목의 교수겸 제독이 되고 또 남원부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추하고 무례한 무리들이 더욱 꺼리고 시기하여 선생이 성균관 유생으로 현양된 이름을 폄하하여 깎아내리고 성균관에 게시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부탁하여 어진 선비를 해치려고 하였다.
또 간사한 무리들이 지칭한 사람은 송강 정철(鄭澈)과 지천 최병길(崔嗚吉)을 말하였다.
선생의 문인으로 스승을 위한 상소를 보고 같은 내용의 기암 정홍병(鄭弘溟)이 아버지를 위한 무고함을 상소한 내용을 보면 가히 흉도들이 거짓으로 꾸며 날조된 것을 알수 있으며 양선생의 마음과 종적이 선명하고 뚜렸한 것을 볼 수 있다.
갑인(1614년 광해6년)년 국구 김재남의 희생옥사 재상 한응인 판서 신흠(申欽) 약봉 서성(徐省) 남곽 박동열朴東說 금계군 박동량(朴東亮)등은 같은 날 체포되었고 선생 역시 연좌되었다.
꿈에 송천 양선생을 만나 깊이 느낀바 있어 남긴 시문이 있는데 점작(占鵲) 점등(占燈) 길몽(吉夢) 등의 시이고 시문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비분 강개하고 하늘의 뜻을 바로 지키는 말이 아님이 없다.
아: 그 당시의 일들은 오히려 참기 어려운 말들로 장차 천지의 변란으로 인륜지도를 어지럽게 하고 바른길을 싫어하는 무리들로 못된것을하여 바른 군자들이 피해를 보았다.
그 독이 선생과 더불어 남방의 흐름이 원만하였으나 그 협의가 명백하다 하니 세사가 어찌 혐의를 면할 수가 있을 것인가? 본 고을 김우성, 나덕윤, 이유경, 나윤제, 박문환 등의 무리에 붙어 이이첨 역시 선생을 싫어하여 나아가 모함을 책하였으니 무리들에 대한 괴로움이 이와 같았다. 그 뒤 방환되어 속세에서 떨어진 송림 속 물 흐르는 높은 곳에 정자를 짓고산수를 취미삼아 시문으로 벗들과 즐겼다.
이렇게 글로 벗한 모임으로 기쁨을 더하였으니 현주 조찬한(趙纘韓) 백호 임제(林悌) 석촌 임석(林石) 창랑 임훤(林煊) 옥봉 백광훈(自光勳) 명고 임전(任전) 한벽 곽기수(郭期壽) 동학 이안눌(李安訥) 수은 강항(姜沆)등 제현들과 도의와 학문으로 교유하면서 서로 왕래하고 송간정(松磵亭)에서 시를 짓기도 했다.
을묘(1615년 광해7년)년 봄에 선생이 해서로 가서 옛날을 생각하면서 팔운을 입으로 읊었으며 비안정을 지나며 시를 지었다.
병진(1616년 광해8년)년에 선생이 조우인(曺友仁)이 입직 승지로 서궁(인목대비 유페처에 대한 부시(賦詩 · 부와 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즉 차운으로 조승지가 그 운을 따라 지었으므로 유배되었으며, 선생의 시는 당시 세상에 전파되지 않았으므로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다.
또 용성교를 지나면서 어진이에게 글을 붙이고 또 남곽의 시를 주었다.
정사(1616년 광해8년)년의 만장이 있고, 윤해평의 시와 아울러 제문이 있으며 유참판의 만장과 시문이 있다.
무오(1617년 광해9년)년에 하서서원에 참배하고 다음 권석주(權石洲) 필(畢) 유서경(柳西坰) 운(韻) 등의 선생을 경모하는 시와 하서의 시와 율은 넓게 서로의 느낌을 발로한 것으로 모두가 이와 같았다.
기성취헌(奇醒醉軒) 이동악(李東岳) 조야은(曺野隱) 등은 서석(端石 : 지금의 광주)과 면앙(免仰지금의 담양) 사이를 왕래하면서 시문을 주고받으며 읊었다.
경신년(1619년 광해11년) 벽사도 찰방으로 나갈 당시 이름 있는 선비들의 특별한 시문이 있으니 박남곽, 김북저, 임석촌, 조현주, 홍해봉, 임송리, 홍지계, 금양위, 박 공, 말선자, 심상국 등과 더불어 정중히 말을 나누며 주고받아 즐겼으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임술년(1622년 광해13년) 귀향하여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온 나라가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논의한 끝에 각 도에 선유사를 뽑아 임지로 보냈는데 선생도 본도(전라도)선유사로 선발되고 여러 차례아사지경에 처한 서민들을 구휼하고 말로 위로하며 개연히 말고삐를 잡고 구황미의 수례에 올라 오로지 한길로 백성을 구하고자 노
력하였다. 계해년(1623년 광해14년) 인조 반정으로 신왕의 승인을 위한 조정 사신에 시문을 증송하였으며 이듬해 갑자년에 호조 참의로 승자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파란 만장의 생애를 통하여 많은 종적을 남기면서 극적인 노쇠현상에서 몸은 약해지고 파리했다.
여명이 얼마되지 않음을 알고 본 고장으로 돌아와 천수를 다하고 별세하였다. 본 고을 금안동 북쪽 탑령 손좌원에 장례를 모셨다.
아! 선생은 총명하고 기운이 맑고 빼어나 일찍이 태헌(苔軒)과 고봉(高峰) 등의 스승을 만나 배웠고, 나아가 거유 을곡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의지했다.
선생은 또한 학덕이 높고 밝았으며 예절이 바르고 대범하여 세상사에 요동됨이 없고 권세와 이익에 굽히지 않았으며 떳떳하여 그의 명예는 빛났다.
그러나 한때는 흉적 허균과 정개청등 무리들의 무고로 곤욕을 치렀으며 이어 의분심을 떨친 정송강, 김건제, 권만취 등과 뜻을 같이 하였다.
갑인(1614년 광해6년)년 이이첨 등의 무고한 옥사(선조계비 인목대비의 친부 김제남의 사사 사건)로 깊은 함정에 빠져 위기에 처하였는데 오히려 화평한 시문으로 서궁 유폐의 비참한 처지를 느끼며 죽음을 각오하고 간장을 애는 듯한 아픔을 노래했다.
또한 그지조를 지키고 충의를 돈독히 굳게 간직하였다.
모두가 학문의 바른 바탕을 넓고 곱게 양성하여 귀신도 감동하는 천지를 세우려 한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흉적들의 위세로 그 방자함이 극심한 가운데 두 손으로 상소문을 받들고 어전에 올려 조정의 분열을 막아바른 선비들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그리하여 당시 이름 있는 현명한 선비들은 이를 우러리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문에 그 탁월한 시상과 걸출한 생각이며 충직한 생각은 마치 목마른 상태에서 바닷물이라도 삼키려는것 같았고 장열한 마음을 헤아림이 마치 하늘을 받친 지주로 그 기둥이 기운 듯 했다.
어찌 시대의 명석한 헤아림이라 하지 않겠는가 벗은 어짐을 보완하고 덕망으로 이웃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선생의 평상시 언행 거지를 살펴보면 교육된 바가 뚜렷하여 그어짐과 덕행을 알 수 있고 그 문장에 이르러서는 세상 사람들을 초월하였다.
백호, 옥봉, 계곡, 택당 등의 뜻과 같았으며 아울러 직접적인 문헌의 인멸로 정확히 못 밝힌다 하드라도 주어진 자료에 의한 추적이 어려움은 불가피하며 당시 누군가의 수중에 보존될 수는 있다하겠다. 다만 현실에 있어 별세 후 행적이나 모습의 기록이 충분치 못한 선생의 불행한 운명을 아쉬워 할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