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홍씨(豐山洪氏)는 1242년 고려 고종 29년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국학(國學) 직학(直學)을 지내신 홍지경(洪之慶)이 시조이시며 안동 풍산에 터잡아 풍산을 본관으로 가문을 창립하셨다.
2세 홍애(洪崖)는 고려문장 12대가의 한사 람, 3세 유(有)와 4세 연(演), 준(俊)은 모두 대제학에 올라 학문하는 집안의 전통을 다졌다.
고려말, 왕조는 기울고 이성계(李成桂)가 무력으로 새 왕조 창건의 야망을 드러낼 때 연의 아들 5세 구(龜)는 낭장의 벼슬을 버리고 경기 고양 고봉산(高峰山)기슭으로 낙향, 은둔했다.
큰 아들 이(伊)는 호남 남평(南平)의 현령(縣令)을 지낸 인연으로 그의 아들 7세 수(樹) 부사공은 계유정란시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나주로 낙향했다가 그곳에서 온갖 시름을 달래며 늘러앉아 지내다 생애를 마쳐 후손들이 나주를 근거지로 광주, 화순, 함평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됐다.
둘째아들 의(儀)와 셋째아들 숙(淑)은 고양 에 머물러 후손들이 서울, 경기, 충주, 원주, 천안 등지로 퍼졌다.
한편 4세 준(浚)의 후예 중 재(載)는 여말 영남으로 옮겨가 그 후손들이 진해, 양산, 합천 등지에 자리잡게 됐다.
고려의 충신집안으로 조선조의 창업에 등을 돌렸던 풍산 홍씨는 6. 7. 8세까지 3대를 벼슬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 명종(明宗) 무렵부터 다시 벼슬길을 열어 옛 명문가의 저력을 발휘해 중앙 정·관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 융성의 문을 연 사람은 홍이상(洪履祥), 난상(鸞祥)형제, 이상은 당대의 거유명신으로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임란 수습에도 그 공이 컸다.
그중에서 홍양호(洪良浩), 홍석주(洪奭周)등의 대학자, 저술가도 있었고, 저서와 문집을 남긴 사람만도 130명이나 된다.
풍산홍씨의 영화의 극치는 정조조에 일세를 주름잡던 10년세도의 홍국영(洪國榮)과 선조의 따님 정명공주(貞明公主)와 영안위 홍주원(洪柱元), 사도세자(莊祖懿皇帝)와 혜경궁홍씨(獻敬懿皇后), 정조와 원빈홍씨, 정조의 따님 숙선옹주(淑善翁主)와 영명위 홍현주(洪顯柱)등 풍산홍씨와 왕실의 국혼(國婚)은 누대를 거쳐 이어졌다.
한말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과 홍용한(洪龍達)의 후손인 홍병주(洪炳柱) 따님이 혼인을 하면서 명실상부한 5번의 국혼으로 조선제일의 명문대가로 그 위세와 영화는 하늘을 찌르는 기세였다.
홍인한(洪麟漢), 홍용한, 홍상한(洪象漢), 홍낙성(洪樂性)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풍산홍씨는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며 사도세자의 안정적 보위계승을 위하여 노력 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과 읍혈록을 남겨 궁중비사를 전하며 국문학사의 백미를 장식했다.
이상의 아우 난상은 형조좌랑을 지냈다.
그의 아들 홍보(洪寶)가 원주목사로 있을 때 횡성 의 도적 이인거(李仁居)를 토벌하여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이 되고, 풍령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조선조 풍산홍씨 문과급제자는 136명, 무과에 오른 이가 92명이다.
그 중 재상이 5명, 문형이 8명, 호당에 든 이가 9명, 봉조하 (朝朝賀)가 6명이나 된다.
그러나 풍산 홍씨의 가문이 가장 크게 긍지로 삼는 것은 문명을 떨친 대대의 저술(著述)이다.
고려조(高麗祖) 홍애집(洪崖集)을 비롯하여 조선조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명엽지해(蓂葉志諧),역대총목(歷代總目), 해동이적(海東異蹟), 소화시평(小華詩平), 시화총림(詩話叢林), 경종(景宗), 순조(純朝) 때의 문호이며 학자인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 역상익(易象翼), 만물원시(萬物原始), 육서경위(六書經緯), 격물해(格物解), 칠정변(七情辨), 목민대방(木民大方), 경약절중(卿約折中), 해동명장부(海東名壯傅),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삭방십유(朔方拾遺), 북한기약(北寒記略),
흥왕조승(興王峰乘)등의 저술들이다.
영조(英祖), 헌종(憲宗) 때의 좌의정(左議政)으로 그 아우 길주(吉周), 현주(顯周)와 더불어 3문장 으로 드날렸던 연천 홍석주(洪奭周)도 문집인 연천집(淵泉集) 외에 동사세가(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등
20여종의 저술을 남겨 홍씨 집안의 저술만으로도 문고(文庫)를 이룰정도, 근세에 들어서도 풍산홍문의 저력은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천주교 최초수덕자 농은 홍유한(洪儒漢), 한일합방의 치욕에 분을 못이겨 자결한 홍범식(洪範植), 중경 임시정부에서 국무령과 의정원의장으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던 홍진(洪震), 그리고 조선3천재(朝鮮三天才)의
하나로 꼽히던 임꺽정전의 저자 벽초 홍명희(洪命熹), 제헌의원으로 정부수립 후 내무부차관 을 두 차례 역임한 홍범희(洪範熹), 전 재무부 장관 홍승희(洪昇熹), 민권운동가 홍남순(洪南淳)변호사, 동국대학교총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홍기삼(洪起三),
성균관장 직무대행을 역임 한 홍기평(洪起平), 40대 조흥은행장을 역임한 홍석주 등이 모두 풍산홍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