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文敬公)홍이상신도비(洪履祥神道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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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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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사.유적명칭
문경공(文敬公)홍이상신도비(洪履祥神道碑)
ㆍ 사.유적유형
신도비(神道碑)
ㆍ 사.유적위치
일산시 덕양구 성석동
ㆍ 간략정보
홍이상신도비(洪履祥神道碑)
벽제읍(碧蹄邑) 성석 4리(城石 4里) 고봉산하(高峯山下)에 위치해 있으며 비(碑)의 높이 는 198cm, 폭은 25cm, 두께는 28cm이다.
이 비문(碑文)은 우의정겸춘추관(右議政兼春秋館) 이정구(李廷龜)가 쓰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용(金尙容)이 전자(篆字)를 썼다.
구부(龜趺) 와 이수( 首)가 갖추어져 있다.
홍이상(洪履祥)(1549-1615)은 조선시대(朝鮮時代) 문신(文臣)으로 초명(初名)은 인상(麟祥), 자(字)는 원례(元禮)· 군서(君瑞). 호(號)는 모당(慕堂), 본관(本貫)은 풍산( 山)이다.
선조 (宣祖) 6년(157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수찬(修撰)·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임 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왕(王)을 호종하였으며 그 후 대사성 (大司成)·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저서(著書) 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여기서 비문(碑文)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문(飜譯文)]
임자년간(壬子年間) (1612)에 군흉(群兇)이 내란(內亂)을 일으켜 큰 화를 빚어내니, 모당홍 공(慕堂洪公)이 도헌(都憲)으로 있다가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간청하여 송도유수(松都留 守)가 되었다.
그 뒤 계축년(癸丑年) 옥사(獄事)가 일어나니 한 때의 동료(同僚)들이 많이 연 루되어 서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공(公)만이 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벼슬을 버리고 송도(松 都)로 가서 다시는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해를 지나 드디어 별세하였다. 공(公)이 위태로운 나라에 처하는 방법에는 선조(先兆)의 기미를 볼 줄 안다 하겠다.
공 (公)이 병이 위중할 때 마침 서호(西湖)에 쫒겨 있던 처지라 가서 살폈더니, 공(公)이 손을 꼭 잡고 탄식하면서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대가 쫒겨난 것이 당연하다만 내 일찍 죽지 못함이 한스럽다』하여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작별하였다.
사흘이 지나 공(公)의 부음(訃音)이 전해졌으니, 공(公)이야 말로 올바로 마치신 분이다. 장례한 지 삼년(三年) 뒤에 공(公)의 자제(子弟)들이 행장(行狀)을 나에게 부탁하면서『아 버님께서 당신을 중히 여기면서 그 사람의 말이라면 족히 후세에 전할 만하다 하였으니 아 버님의 비석은 당신이 새겨 주시오.
한 말씀을 얻어 길이 전한다면 당신이 끝내 은혜를 베 푸는 것입니다』한다. 슬프다.
공(公)과 작별한 때의 말이 뚜렷이 귓가에 있고, 내 아직 죽지 않아 차마 또 공 (公)의 명문(銘文)을 써야 하다니. 공(公)의 행장(行狀) 살피건대, 공(公)의 초휘(初諱)는 인상(麟祥)이고, 자(字)는 군서(君瑞)인데 뒤에 개명(改名)하여 이상(履祥)이라 하고, 자(字)는 원례(元禮)라 하고 모당(慕堂)이 호(號)이다.
홍씨(洪氏)의 가계(家系)가 안동(安東)의 풍산현 ( 山縣)에서 출발하였으니, 고려(高麗)때 삼경(三慶)은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벼슬이 직학 (直學)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시조(始祖)가 된다.
간(侃)을 낳으시니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이고, 저술(著述)한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있다.
유밀(侑密)을 낳으시니 직사(直使)이시고 연(演)을 낳으시니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이시고 구(龜)를 낳으시 니 우낭장(右郎將)으로, 이 분이 공(公)에게 오대조(五代祖)가 되고 고양(高陽)에 살았다.
고조(高祖) 숙(澁)은 좌군사정(左軍司正)이고, 증조(曾祖) 계종(繼宗)은 사포별제(司圃別提) 이고, 조(祖) 우전(禹甸)은 부사용(副司勇)이나 좌승지(左承旨)로 증직(贈職)되었고, 고(考) 조(脩)는 부사직(副司直)으로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贈職)되었다.
사실은 부장(部將) 세경 (世敬)의 아드님인데 승지공(承旨公)이 아들이 없어 양자삼았던 것이다.
문경백씨(聞慶白氏) 습독관(習讀官)인 승수(承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기유년(己酉年)에 고봉(高峯) 아래에서 공(公)을 낳으시었다. 장중(莊重)하시고 말씀이나 웃음이 적어 몸가짐을 스스로 규제하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했고, 성년(成年)이 되기전에 여러 차례 학교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지 만, 뜻이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행촌(杏村) 민공(閔公) 순(純)이 강당(講堂)을 얻어 후 진(後進)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곧 책을 싸가지고 따라갔다.
의리(義理)의 공부를 연구하여 홀로 묘오(妙悟)의 경지를 터득하니, 다른 학생은 쳐다보지를 못해쏘 행촌선생(杏村先生)도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계유년(癸酉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니 이름이 더욱 드날렸다.
태학(太學)에서 신구방(新舊榜)으로 자리를 하나, 공(公)이 항변하되 인륜(人倫)을 밝히는 곳에서 어찌 장공유(長公幼)의 차서가 없는가 하고 마침내 나이로 정했다.
무인년(戊寅年) 대정(大庭)의 대책 (對策)에서 수석(首席)을 하여 곧 바로 전시(殿試)로 나가게 되었고 기묘년(己卯年)에 또 장 원(壯元)으로 뽑혔다.
선조(宣祖)가 정신( 臣)들에게 이르시되, 『이제 장원(壯元)의 대책(對 策)을 보니 정대(庭對)의 체통을 잘 터득했도다.
요사이 과거(科擧)의 문장(文章)이 아니로 다』하셨다.
재상 노수신(盧守愼)도 따라 칭찬하였다.
윤두수공(尹斗壽公)도 역시 이르되, 『신(臣)이 그 사람의 됨됨을 아느데 품행이 방정한 선비라 문장(文章)에만 뛰어난 것이 아 닙니다』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뜻이 더욱 깊어졌고, 조정의 여망(與望)이 대단했다.
예조 (禮曹) 호조랑(戶曹郞)에서 정언(正言)으로 전보(轉輔)되어 경정(經 )에 나아가 사리(事理) 를 논쟁(論爭)함이 칼날같아 궁위(宮 )의 폐습을 논박함에 있어서도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동지하례사(冬至賀禮使)가 되어 중국(中國)을 다녀옴에 있어서 일체의 일을 법(法)대로 행하 니 일행이 모두 숙연히 하였다. 돌아오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어 제교(制敎)을 맡았다.
신사년(辛巳年)에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니 임금께서 부의를 남달리 하였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수관(修館) 병조좌랑(兵曹佐郞)에서 곧 호조(戶曹)로 옮겨 좌랑(佐 郞)이 되었고, 사신(詞臣)을 선발하여 호당(湖堂)에 휴가주어 독서(讀書)하게 할 때, 유신(儒 臣)을 선발하고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하는 일을 공(公)이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께서는 삼공(三公)에게 명(命)하여 당하(堂下)의 문관(文官) 중에서 학행(學行)과 재망 (才望)이 있는 자를 가려 각기 아는대로 천거하라 하니 재상 정유길(鄭惟吉)이 공(公)을 으 뜸으로 천거하여 교리(校理)가 되었다.
하루는 경정(經 ) 중에서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율곡(栗谷)을 심히 비방하니 공(公)이 이르기를, 『여립(汝立)이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다가 드디어 배반하였구나.
그 말을 들어보 니 오만불손하니 이런 무리는 마땅히 미워하여 끊어야 합니다.』하니 선조(宣祖)께서 공(公) 의 말이 옳다하시고, 그 뒤에 하교(下敎)하시고, 『여립(汝立)은 형서(邢恕)라 하겠도다』하 셨다.
지평(持平)에서 두 번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다음 해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시니, 이로부터 응교(應敎)·집의(執義)·태복정(太僕正)을 두 번씩 지냈고, 사간(司 諫)을 세 번씩 역임하셨고, 사인(舍人)이 된 것이 다섯 번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변(變)에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다가 곧 해서안무어사(海西按撫御史)로 전출되었다.
신묘년(辛卯年) 봄 드디어 직제학(直提學)에서 승지(承旨)가 되셨다.
고사(故事)에 당상(堂 上)을 당세(堂世)라 쓰는 것이 있는데, 문형(文衡)이 덕망을 길러 세상에 드문 선발을 했기 때문인데 공(公)과 다른 세 사람이 이에 참여하였다.
대신(大臣)에게 명(命)하여 재보(宰輔)로 합당한 사람을 선발하라 하여 추천된 사람이 여 섯인데 공(公)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어필(御筆)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특채되었고, 임 진년(壬辰年) 여름에는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어가를 모시고 서도(西道)의 길을 떠났다가가 부제학(副堤學)으로 옳겼다. 송도(松都)에 이르러 임금의 면전(面前)에서 간신들이 정치(政 治)에 간여한 죄를 말하여 목을 베어 백성에게 사죄하게 하니, 선조(宣祖)께서 낮빛을 변하 시어 이르시되, 『사실 이런 일은 없었으니 나라가 망한다 하여도 죄없는 사람을 죽이라 할 수는 없다』하였다.
그러나 공(公)이 날마다 논쟁하여 마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公) 을 위험스러히 여기더라. 평양(平壤)에 이르러 소(疎)를 올려 국모(國母)를 찾아 뫼시게 하니, 각도(各道)의 감사에 게 유시하여 잘 호송해 모시도록 하니, 공(公)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모(國母)를 모셔 성천 (成川)의 임시 조정(朝廷)에 나아갔고,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계사년(癸巳年)에 양궁(兩宮)이 정주(定州)에서 만나니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갑오년 (甲午年)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갔다와서 다시 좌승지(左承旨)가 되어 가선대부(嘉善大 夫)로 승진하여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되다.
당시 적(賊)이 해상(海上)에 있어 전 쟁의 기미가 급박하였다.
공(公)이 가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전답(田畓)을 넓혀 의승군(義勝 軍)을 설치하여 적당한 훈련을 시켰다.
치적(治積)이 알려져 임기가 끝났어도 연임되었다.
병신년(丙申年)에 경기도안절(京畿道按節) 로 나갔다가 임기 후 일년(一年)을 연임 했다가 형조참판겸부총관(刑曹參判兼副摠管)이 되 고 부제학(副堤學) 겸(兼) 비국유사(備局有司)로 연임되었다.
명조(明朝)의 포정(布政) 양조 령(梁祖齡)의 접빈신(接 臣)을 선발할 때 선조(宣祖)께서 공(公)에게 특명(特命)하여 옥당 (玉堂)에 가게 했다. 중임(重任)을 정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돌아오매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켰다.
기해년(己亥年)에 우윤(右尹)으로 전보(轉輔)되었다. 일찍이 옥당(玉堂)에 이을 때 양진소 (養陳疏)를 썼었는데, 이 때에 와서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자신을 통제하고 도민(道 民)에 은혜로이 하고 학교를 세우고 윤리(倫理)를 두텁게 하니 한 달이 못되어 교화(敎化)가 크게 일었다.
그 때 홍여순(洪汝諄)이 방자하고 탐학(貪虐)하여, 공(公)이 미워하여 여러 차 례 논박하였더니, 그 무리 중에 구의강(具義剛)이 어사(御史)가 되자 덕망을 시기하여 죄를 얽어 매었다.
도민(道民)이 부모(父母)를 잃은 듯 슬퍼하여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세웠 다.
대사성(大司成)으로 풀어 주시니 세상에 참 선비 얻었다 하였다.
신축년(辛丑年)에 좌부 빈객(左副賓客)을 겸직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옮겼다. 대사헌(大司憲)시절에 영남 (嶺南)의 선비 문경호(文景虎)가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여 사류(士類)를 무찌르려는 계획 을 상소하고, 기자헌(奇自獻)이 이에 동조하니 공(公)이 한껏 변론, 해명하다가 오히려 체직 이 되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전출되었다.
임기가 끝나 돌아오니 다시 호조참판겸동지춘추 관사(戶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직하였다.
정미년(丁未年)에 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전출되었다.
광해초(光海初)에 공(公)이 전왕 (前王)의 조정에서 경정(經 )의 옛 신하였다는 것으로 대사간(大司諫)으로 불러 들였다가 대사헌 부제학으로 옮겼다.
그 때 대사간(大司諫)이 결원이 되므로 수상(首相)이원익(李元 翼)이 각망(各望)을 참작하여 세 사람을 천거하였더니, 광해군(光海君)이 세 번 물리치고 끝 내 친척(親戚)으로 맡게하니 여론이 비등하니 임곤(任袞)과 박여량(朴汝樑)은 현인(賢人)을 들어 쓰는 데는 특정이 없다는 말을 들어 해명하니 공(公)이 옥당(玉堂)에 있다가 상소하여 임(任)·박(朴)을 논척하고 또 조정(趙挺)이 어란(御亂)을 전하지 않은 죄를 논박하니 군소 배(群小輩)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유년(己酉年)에 예조참판이 되고 여름에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광해군(光海君)이 오래도록 경정(經 )을 폐하니, 대중(大衆)의 정(情)이 막히더니 마침 대신(大臣)의 인대(引對) 가 있어, 공(公)이 역시 입시(入侍)하여 극히 부당함을 말했더니 광해군(光海君)은 기꺼이 받아 들였고, 상신(相臣)을 바라보면서 조정의 저작이 부정하니 대신들은 이 뜻을 알아 경박 하여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쓰지 말라 하였다.
재상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이는 실로 지금의 고질이니 비록 현신(賢臣)이 맡더라도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공 (公)이 말하기를 『조화롭게 진정(鎭靜)할 책임은 대신들에게 있고 대신들이 그 직분을 다 하게 하는 것은 임금님이 책임입니다.
근래 국가(國家)에서 사람을 쓰는 데 대신(大臣)들이 미리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큰 폐단입니다.』말씀이 심히 엄정(嚴正)하니 선비들의 논 란이 식더라, 명조(明朝)에서 선조(宣祖)의 제천사(祭天使)로 태화(態化)를 보내어 예관(禮 官)이 「종(宗)」의 칭호를 숨기고 은밀히 계청(啓請)하여 가짜 신주(神主)를 만들고자 하니 공(公)이 예관을 탄핵하되, 천자(天子)가 사신을 보내어 제사하는 것인데 이 무슨 일로 감히 가짜 신주(神主)를 진설하여 제향하게 하느냐 하니 논의가 가라앉았고, 논의하던 자들도 탄 복하였다.
사직하고 대사성으로 체직되었고, 가을에 또 대사헌이 되었다.
십(十)월에 대부인(大夫人) 의 상를 당했다. 신해(辛亥)에 상을 마치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
임자년(壬子年) 봄에는 대사간(大司諫) 대사 성(大司成) 춘추관사(春秋館事) 까지 겸해서 맡았다.
공(公)이 당시의 일이 날로 그릇됨을 보고, 영환(榮宦)에는 뜻이 없어 한결같이 외직(外職)을 원하여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 다.
조정(朝廷)을 시작하던 날 광해군(光海君)이 인견(引見)하니 공이 조정안 붕당의 화를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이르되, 『하북(河北)의 적(賊)을 제거하기는 쉬워도 붕당(朋黨)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하니 그렇지 않겠는가.』하니 공(公)이 정색(正色)하고 말하되, 『이는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입니다.
인군(人君)이 먼저 본원(本原) 의 바탕을 세워서 사정(邪正)을 분별하면 당화(黨禍)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하며 이에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功夫)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건극(建極)의 설명을 명백하게 펴냈다.
이에 이덕성(李德聲)이 나와서 사람들에게,『대신(大臣)은 반드시 유신(儒 臣)으로 등용(登用)해야겠더라.
홍(洪) 아무개의 경정(經 )에서의 논리는 우리로는 따를 수 없더라』하였다.
당시에 적신(賊臣)들이 이미 집권을 하여 사당(社黨)으로 뿌리 내려 거취 (去就)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임소(任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사의(辭意)을 올렸으나 체직되지 않았다.
일찍이 조그마한 축대가 송추(松楸)를 쳐다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임기가 차자 곧 바로 돌아 와서 물 가에 한 정자를 구축하고, 날마다 이웃의 친척과 시주(詩酒)를 즐겼다.
어쩌다 조정(朝廷)의 시비 (是非)나 관장(官長)의 득실(得失)을 말하는 이가 있으면 곧 손을 흔들어 제지하였다.
계축 년(癸丑年)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망극하니 밤새 잠을 이루지 않고, 어쩌다가는 눔물 이 옷깃을 적시면서, 『내 일찍 이런 꼴 보지 않으려 했는데』하셨다.
을묘(乙卯) 사월(四月)에 병이 나시자 성(城) 서(西)쪽의 옛 댁으로 돌아 오셔서 약을 물리 치고 말씀하시되 『사생(死生)은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이걸 먹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 겠느냐』운명 직전 까지도 의기(意氣)가 평안하시어 친우(親友)와 이별하면서 완전함을 얻 어 돌아 가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구(九)월 십구(十九)일에 돌아 가시니 춘추(春秋) 는 육칠(六七)이었다.
고양(高陽)의 고봉(高峯) 밑 신좌(辛坐) 을향(乙向)에 장례하시다.
공(公)은 타고 나신 기품이 수미(粹美)하시고, 효도와 우애가 가정스러워 아들의 직책을 한결같이 성인의 가르침에 따랐다.
매일같이 닭이 울면 세수하고, 부모님 처소로 가 문안드 리고, 진지 상을 드리고 물러와 책을 읽곤 하였다.
찬성공(贊成公)이 늙게 풍병(風病)에 걸 리시니 병장(病狀)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약을 드리고, 의사를 보면 반드시 절을 했고 눈 물을 흘렸다.
옷을 벗고 자는 일이 없기 십(十)여 년에 끝내 좌환이 정상으로 돌아가 건강하 게 종명(終命)하셨으니, 사람마저 효성의 영감이라 하더라. 상을 당하여 피나게 우시기 삼(三)년, 상복을 벗는 일이 없고, 슬퍼하시기가 거의 실성하 실 지경이었다. 가세(家勢)가 가난하고 아우들이 약하여 멀리 갈 수 없으매, 공(公)이 시병(侍病)하는 틈 에 두 아우를 거느리고 학업(學業)을 전하여, 혹은 매를 치면서까지 경계하여 성곡하게 하였 고, 부모(父母)가 재세(在世)하실 때에 과거를 해서 영광을 보여드리게 하였다.
가산(家産)을 나누어 줌에 있어서는 좀 나은 것은 모두 주었고, 조카들을 자식처럼 사랑했으며 결혼의 비 용도 모두 자담(自擔)하셨다. 외로운 이를 항시 집 안에서 돌보았고 친척에게는 멀고 가까움 이 없이 대했으며, 상제(喪制)에는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제사에는 바드시 목욕을 하 시며, 비록 병환이 있어도 거르시는 일이 없었다.
본성이 소박하시어 사치를 물리치시며, 항 상 자제들에게 이르시되, 『가세(家世)가 쇠체(衰替)하다가 내게 와서 이런 영화를 받는 것 은 오직 조선(祖先)들이 적덕(積德)한 덕택이니 너희들은 친구를 가리어 사귀고, 말을 삼가 며 평의(評議)를 좋아하여 사당(私黨)을 만들어 이름내고 진로(進路)로 삼는 일이 절대로 없 어야 하겠다.』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옛 가르침에 잠겨 심신(心神)을 거두어 종일(終日)토록 게으른 모습 을 보이지 않았다.
공무(公務)에서 물러나신 이후로는 사람들과의 왕래(往來)를 끊으시고, 객(客)이 와서 자 리를 같이 할 때는 혹 기꺼이 마셔 취해도 곧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평생에 서두르는 말이나 황급한 빛이 없으니, 비록 환란이 창황할 때라 사무에 혼란하실 때라도 적기(積氣)가 웅용하시며 조처하심이 밝고 자상하시고 겸손으로 스스로 거두시었고, 남과 대비하는 일이 없고, 시비공사(是非公私)의 판단에 있어서 한 마디라고 고의(古義)를 본받아 의연(毅然)히 그 기개를 빼앗을 수 없다.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어서 처신접물(處身接物)이 처음 마음과 같이 일찍이 변하는 일이없 고, 안으로 감추고 남에게 알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 안에서의 지극하신 행동 이 이웃에게는 알려지지가 않았다.
대저 공(公)은 학문에 사우(師友)의 전통(傳統)이 있어 항시 마음 공부에 힘써 몸가짐이나 말씀에 반드시 이치에 맞기를 바랐고, 관(官)에서의 일이나 조정에서의 언론에 모두 연원(淵 源)이 있어 배운 것에 어긋남이 없었다.
항시 탄식하시되, 『어려서 배우기를 즐겨 거의 깊 은 경지에 갔다가 중년(中年)에 벼슬살이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늙어서 이룬 것이 없으 면 이는 배우는 이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선조(宣祖)를 만나 여러 차례 은혜로운 포장을 받고, 심지어는 강관(講官) 중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정대(庭 對)에 연이어 수석(首席)하여 일찍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문명(文名)이 자자하였으니, 명망 (名望)과 사실이 겸전하였다.
그러나 끝내 문장(文章)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다.
아드님 ?이 원종일등훈(原從一等勳)이고, 손자(孫子) 주(柱)는 원귀(元貴)로 여러 차례 증 직(贈職)이 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부인(夫人) 김씨(金氏)는 안동(安東)의 명망있 는 집안으로 고려기(高麗期)의 시중(侍中)인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조(祖)는 춘(春)이니 무 주현감(茂朱縣監)이고, 아버지는 고언(顧言)이니 장흥부사(長興府使) 유충정(柳忠貞)의 따님 을 얻어 가정갑인(嘉靖甲寅)에 부인이 태어나시었다.
온유하시고 현숙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라 부녀의 일을 배우지 않아도 잘 하셨다.
공(公)의 가문으로 시집오셔서 웃어른 섬기는 일을 예법으로 하셨다.
공(公)의 집이 가난하였기에 집안살림을 친히 하면서 손수 음 시를 장만하여도 군색한 빛을 보이지 않으셨다.
시집와서 늙기까지 또한 구히 되어 명부직 (命婦職)을 받고 자손들이 그득하여 부도(婦道)를 지키시기 한결같이 하셨다.
일가에 우애하 고, 아랫 사람 부리는 것에도 모두 법식을 갖추시어 규문(閨門)이 마치 조정(朝廷)처럼 엄숙 함이 있어 복스러운 어머니 대접을 받았고, 아들 또한 많이 두시어 세상에서 현부인(賢婦人) 으로 칭찬되었다.
공(公)이 돌아가심에 슬퍼하심이 지나쳐 겨우 돌만에 돌아가시니 공(公)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공(公)이 육남이녀(六男二女)를 두니, 맏이는 방 으로 가선부인(嘉善夫人) 대사간(大司諫) 이고, 다음은 입( )으로 문과첨지(文科僉知)이고, 다음 ?는 문과(文科)로 장령(掌令)이고, 다 음은 영(霙)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이고, 다음 ?는 음덕(蔭德)으로 수참판관(水站判官)의 보 직을 받았고, 다음 ?은 진사(進士) 개성도사(開城都事)였다.
따님은 참봉(參奉) 이경유(李敬 裕)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지평(地平) 조공숙(趙公淑)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예조정랑(禮曹正 郞) 허계(許啓)에게 시집갔다.
방이 일남삼녀(一男三女)를 두니 남(男) 주일(柱一)은 새로이 문과(文科)에 올랐고, 여(女)는 판관(判官) 윤탄(尹坦)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제방(祭訪) 윤?(尹?)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한 종서(韓宗緖)에게 출가했다.
입( )은 아들이 없어 영(霙)의 아들 주후(柱後)로 양자 하였다.
?는 일녀(一女)를 두니 허제(許 )에게 출가했다. 영(霙)은 오남사녀(五男四女)를 두니 맏 이 주원(柱元)은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취하여 영안위(永安尉)가 되었고, 다음은 주훈(主勳) 이다. 따님은 이준구(李俊耉)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진사(進士) 이시술(李時術)이고, 다음은 이항진(李恒鎭)에게 출가(出嫁)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는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으니, 따님은 박종부(朴宗缶)에게 출가했고, 아들 주하(柱 夏)는 생원(生員)이다.
?은 사남이녀(四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 맏이가 주건(柱建)이고, 나멀지는 어리다.
이경유(李敬裕)는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몽익(夢翼), 딸은 생원(生員) 백 상빈(白尙賓)에게 시집갔다.
조공숙(趙公淑)은 일남이녀(一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형(世馨)이고, 따님은 이유형 (李惟馨)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권유(權?)에게 시집갔다.
허계(許啓)가 이남일녀(二男一女)를 두니 따님은 이경휘(李敬徽)에게 출가했다.
한종서(韓 宗緖)가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다. 세형(世馨) 이유형(李惟馨)은 모두 이남(二男)을 두고, 주원(柱元)이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고 허제(許 )가 삼남(三男)을 두고, 이몽익(李夢翼)이 아들 진발(震發)을 두고, 박종부(朴宗缶), 이준구(李俊耉), 이시술(李時術)은 모두 일남일녀 (一男一女)를 두었고, 이?가 일남(一男)을 두고 권?가 일남(一男)을 두고, 진발(震發)은 이남 (二男)을 두니 어리다.
내외(內外)의 손자가 칠ㅇ여인(七ㅇ餘人) 오! 선비가 영화로운 길을 만나 좋은 이름을 얻는 것이 비록 때를 만나 드날기거나, 혹은 명예를 훼방받는 경우도 있다.
허나 공(公)과 같은 이는 조정에 있기 40년에 항상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받아, 사람마다 공(公)으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비곡 여론이 빛나가 더라도 공의 생애는 엿볼수가 없었다.
위기(危機)가 여러 차례 있었어도 감히 공(公)에게 잘 못을 씌우지 못했다.
만년(晩年)에는 모든 일을 사양하고 한가이 거하여 스스로 진퇴(進退)의 지조를 가저, 어 려운 때에도 순리로 대처하여 남의 속박을 받지 않고 홀로 온전한 이름과 절개를 지켜 평안 히 가셨으니, 비록 공(公)에게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하고 수(壽)를 더 오래하셨더라도 이러 한 지조는 바꾸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는 공의 평생의 의지를 임종하시던 때의 말씀으로도 알 수가 있다..
자손들이 모두 가훈(家訓)을 지켰고, 네 아들과 두 사위가 이어 대과(大科)에 올라 관복 (官服)이 빛나고 위품이 늠름하니, 하늘이 공(公)에게 베푼 것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명(銘) 을 하되, 선조(宣祖)가 사람을 쓰시니 인재(人材)가 무리로 일어나다.
누구를 기다려 유독 쟁쟁한 많은 선비가 몰렸던가, 오직 공(公)이 정대(庭對) 하신 말을 임금님도 『아름답다』칭찬하셨 네. 신하의 직분으로 도움뿐 아니라 문장(文章)도 화려하셨다.
덕행(德行)과 정사(政事)에 제 대로 안하심이 없다.
성대(盛大)한 강정(講 )에는 임금도 허심탄회하셨다.
이에 천관(天官) 으로 사랑받고 현신(賢臣)의 길로 지목되도다.
수각(壽閣)에 계셔 국가의 기강이 삼엄했고, 지방장관(地方長官)으로 임용되어서는 능숙한 처사 미흡함이 없었다.
모든 선발의 대상에는 공(公)이 반드시 우선으로 꼽혔다. 어찌 공(公)이 는하기만 했으랴. 선조(宣祖)께서 공(公)을 아셨다. 공(公)은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솔선하여 몸소 하심이라. 잘못 을 바로잡고 행신(倖臣)들에게 항론(抗論)하시다.
혼탁한 조정에서 기미를 알아 함정에 빠짐 을 면하게 되다.
만년(晩年)에 전원(田園)에 있어 시서(詩書)로 만족하시다.
대저 공(公)의 평생은 모두가 학문의 힘이었다.
명계(明啓)하게 몸과 이름을 지켜, 살아서나 죽어서나 평안 하시다.
다하지 못한 것은 하나의 경(經)으로 남겨 주셨다.
내 이 가정을 살펴 보니 벼슬아 치가 그득하구나.
더욱 공(公)의 덕이 빛날 것을 알겠노라.
벽제읍(碧蹄邑) 성석 4리(城石 4里) 고봉산하(高峯山下)에 위치해 있으며 비(碑)의 높이 는 198cm, 폭은 25cm, 두께는 28cm이다.
이 비문(碑文)은 우의정겸춘추관(右議政兼春秋館) 이정구(李廷龜)가 쓰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용(金尙容)이 전자(篆字)를 썼다.
구부(龜趺) 와 이수( 首)가 갖추어져 있다.
홍이상(洪履祥)(1549-1615)은 조선시대(朝鮮時代) 문신(文臣)으로 초명(初名)은 인상(麟祥), 자(字)는 원례(元禮)· 군서(君瑞). 호(號)는 모당(慕堂), 본관(本貫)은 풍산( 山)이다.
선조 (宣祖) 6년(157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수찬(修撰)·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임 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왕(王)을 호종하였으며 그 후 대사성 (大司成)·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저서(著書) 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여기서 비문(碑文)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문(飜譯文)]
임자년간(壬子年間) (1612)에 군흉(群兇)이 내란(內亂)을 일으켜 큰 화를 빚어내니, 모당홍 공(慕堂洪公)이 도헌(都憲)으로 있다가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간청하여 송도유수(松都留 守)가 되었다.
그 뒤 계축년(癸丑年) 옥사(獄事)가 일어나니 한 때의 동료(同僚)들이 많이 연 루되어 서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공(公)만이 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벼슬을 버리고 송도(松 都)로 가서 다시는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해를 지나 드디어 별세하였다. 공(公)이 위태로운 나라에 처하는 방법에는 선조(先兆)의 기미를 볼 줄 안다 하겠다.
공 (公)이 병이 위중할 때 마침 서호(西湖)에 쫒겨 있던 처지라 가서 살폈더니, 공(公)이 손을 꼭 잡고 탄식하면서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대가 쫒겨난 것이 당연하다만 내 일찍 죽지 못함이 한스럽다』하여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작별하였다.
사흘이 지나 공(公)의 부음(訃音)이 전해졌으니, 공(公)이야 말로 올바로 마치신 분이다. 장례한 지 삼년(三年) 뒤에 공(公)의 자제(子弟)들이 행장(行狀)을 나에게 부탁하면서『아 버님께서 당신을 중히 여기면서 그 사람의 말이라면 족히 후세에 전할 만하다 하였으니 아 버님의 비석은 당신이 새겨 주시오.
한 말씀을 얻어 길이 전한다면 당신이 끝내 은혜를 베 푸는 것입니다』한다. 슬프다.
공(公)과 작별한 때의 말이 뚜렷이 귓가에 있고, 내 아직 죽지 않아 차마 또 공 (公)의 명문(銘文)을 써야 하다니. 공(公)의 행장(行狀) 살피건대, 공(公)의 초휘(初諱)는 인상(麟祥)이고, 자(字)는 군서(君瑞)인데 뒤에 개명(改名)하여 이상(履祥)이라 하고, 자(字)는 원례(元禮)라 하고 모당(慕堂)이 호(號)이다.
홍씨(洪氏)의 가계(家系)가 안동(安東)의 풍산현 ( 山縣)에서 출발하였으니, 고려(高麗)때 삼경(三慶)은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벼슬이 직학 (直學)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시조(始祖)가 된다.
간(侃)을 낳으시니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이고, 저술(著述)한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있다.
유밀(侑密)을 낳으시니 직사(直使)이시고 연(演)을 낳으시니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이시고 구(龜)를 낳으시 니 우낭장(右郎將)으로, 이 분이 공(公)에게 오대조(五代祖)가 되고 고양(高陽)에 살았다.
고조(高祖) 숙(澁)은 좌군사정(左軍司正)이고, 증조(曾祖) 계종(繼宗)은 사포별제(司圃別提) 이고, 조(祖) 우전(禹甸)은 부사용(副司勇)이나 좌승지(左承旨)로 증직(贈職)되었고, 고(考) 조(脩)는 부사직(副司直)으로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贈職)되었다.
사실은 부장(部將) 세경 (世敬)의 아드님인데 승지공(承旨公)이 아들이 없어 양자삼았던 것이다.
문경백씨(聞慶白氏) 습독관(習讀官)인 승수(承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기유년(己酉年)에 고봉(高峯) 아래에서 공(公)을 낳으시었다. 장중(莊重)하시고 말씀이나 웃음이 적어 몸가짐을 스스로 규제하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했고, 성년(成年)이 되기전에 여러 차례 학교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지 만, 뜻이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행촌(杏村) 민공(閔公) 순(純)이 강당(講堂)을 얻어 후 진(後進)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곧 책을 싸가지고 따라갔다.
의리(義理)의 공부를 연구하여 홀로 묘오(妙悟)의 경지를 터득하니, 다른 학생은 쳐다보지를 못해쏘 행촌선생(杏村先生)도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계유년(癸酉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니 이름이 더욱 드날렸다.
태학(太學)에서 신구방(新舊榜)으로 자리를 하나, 공(公)이 항변하되 인륜(人倫)을 밝히는 곳에서 어찌 장공유(長公幼)의 차서가 없는가 하고 마침내 나이로 정했다.
무인년(戊寅年) 대정(大庭)의 대책 (對策)에서 수석(首席)을 하여 곧 바로 전시(殿試)로 나가게 되었고 기묘년(己卯年)에 또 장 원(壯元)으로 뽑혔다.
선조(宣祖)가 정신( 臣)들에게 이르시되, 『이제 장원(壯元)의 대책(對 策)을 보니 정대(庭對)의 체통을 잘 터득했도다.
요사이 과거(科擧)의 문장(文章)이 아니로 다』하셨다.
재상 노수신(盧守愼)도 따라 칭찬하였다.
윤두수공(尹斗壽公)도 역시 이르되, 『신(臣)이 그 사람의 됨됨을 아느데 품행이 방정한 선비라 문장(文章)에만 뛰어난 것이 아 닙니다』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뜻이 더욱 깊어졌고, 조정의 여망(與望)이 대단했다.
예조 (禮曹) 호조랑(戶曹郞)에서 정언(正言)으로 전보(轉輔)되어 경정(經 )에 나아가 사리(事理) 를 논쟁(論爭)함이 칼날같아 궁위(宮 )의 폐습을 논박함에 있어서도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동지하례사(冬至賀禮使)가 되어 중국(中國)을 다녀옴에 있어서 일체의 일을 법(法)대로 행하 니 일행이 모두 숙연히 하였다. 돌아오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어 제교(制敎)을 맡았다.
신사년(辛巳年)에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니 임금께서 부의를 남달리 하였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수관(修館) 병조좌랑(兵曹佐郞)에서 곧 호조(戶曹)로 옮겨 좌랑(佐 郞)이 되었고, 사신(詞臣)을 선발하여 호당(湖堂)에 휴가주어 독서(讀書)하게 할 때, 유신(儒 臣)을 선발하고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하는 일을 공(公)이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께서는 삼공(三公)에게 명(命)하여 당하(堂下)의 문관(文官) 중에서 학행(學行)과 재망 (才望)이 있는 자를 가려 각기 아는대로 천거하라 하니 재상 정유길(鄭惟吉)이 공(公)을 으 뜸으로 천거하여 교리(校理)가 되었다.
하루는 경정(經 ) 중에서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율곡(栗谷)을 심히 비방하니 공(公)이 이르기를, 『여립(汝立)이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다가 드디어 배반하였구나.
그 말을 들어보 니 오만불손하니 이런 무리는 마땅히 미워하여 끊어야 합니다.』하니 선조(宣祖)께서 공(公) 의 말이 옳다하시고, 그 뒤에 하교(下敎)하시고, 『여립(汝立)은 형서(邢恕)라 하겠도다』하 셨다.
지평(持平)에서 두 번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다음 해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시니, 이로부터 응교(應敎)·집의(執義)·태복정(太僕正)을 두 번씩 지냈고, 사간(司 諫)을 세 번씩 역임하셨고, 사인(舍人)이 된 것이 다섯 번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변(變)에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다가 곧 해서안무어사(海西按撫御史)로 전출되었다.
신묘년(辛卯年) 봄 드디어 직제학(直提學)에서 승지(承旨)가 되셨다.
고사(故事)에 당상(堂 上)을 당세(堂世)라 쓰는 것이 있는데, 문형(文衡)이 덕망을 길러 세상에 드문 선발을 했기 때문인데 공(公)과 다른 세 사람이 이에 참여하였다.
대신(大臣)에게 명(命)하여 재보(宰輔)로 합당한 사람을 선발하라 하여 추천된 사람이 여 섯인데 공(公)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어필(御筆)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특채되었고, 임 진년(壬辰年) 여름에는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어가를 모시고 서도(西道)의 길을 떠났다가가 부제학(副堤學)으로 옳겼다. 송도(松都)에 이르러 임금의 면전(面前)에서 간신들이 정치(政 治)에 간여한 죄를 말하여 목을 베어 백성에게 사죄하게 하니, 선조(宣祖)께서 낮빛을 변하 시어 이르시되, 『사실 이런 일은 없었으니 나라가 망한다 하여도 죄없는 사람을 죽이라 할 수는 없다』하였다.
그러나 공(公)이 날마다 논쟁하여 마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公) 을 위험스러히 여기더라. 평양(平壤)에 이르러 소(疎)를 올려 국모(國母)를 찾아 뫼시게 하니, 각도(各道)의 감사에 게 유시하여 잘 호송해 모시도록 하니, 공(公)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모(國母)를 모셔 성천 (成川)의 임시 조정(朝廷)에 나아갔고,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계사년(癸巳年)에 양궁(兩宮)이 정주(定州)에서 만나니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갑오년 (甲午年)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갔다와서 다시 좌승지(左承旨)가 되어 가선대부(嘉善大 夫)로 승진하여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되다.
당시 적(賊)이 해상(海上)에 있어 전 쟁의 기미가 급박하였다.
공(公)이 가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전답(田畓)을 넓혀 의승군(義勝 軍)을 설치하여 적당한 훈련을 시켰다.
치적(治積)이 알려져 임기가 끝났어도 연임되었다.
병신년(丙申年)에 경기도안절(京畿道按節) 로 나갔다가 임기 후 일년(一年)을 연임 했다가 형조참판겸부총관(刑曹參判兼副摠管)이 되 고 부제학(副堤學) 겸(兼) 비국유사(備局有司)로 연임되었다.
명조(明朝)의 포정(布政) 양조 령(梁祖齡)의 접빈신(接 臣)을 선발할 때 선조(宣祖)께서 공(公)에게 특명(特命)하여 옥당 (玉堂)에 가게 했다. 중임(重任)을 정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돌아오매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켰다.
기해년(己亥年)에 우윤(右尹)으로 전보(轉輔)되었다. 일찍이 옥당(玉堂)에 이을 때 양진소 (養陳疏)를 썼었는데, 이 때에 와서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자신을 통제하고 도민(道 民)에 은혜로이 하고 학교를 세우고 윤리(倫理)를 두텁게 하니 한 달이 못되어 교화(敎化)가 크게 일었다.
그 때 홍여순(洪汝諄)이 방자하고 탐학(貪虐)하여, 공(公)이 미워하여 여러 차 례 논박하였더니, 그 무리 중에 구의강(具義剛)이 어사(御史)가 되자 덕망을 시기하여 죄를 얽어 매었다.
도민(道民)이 부모(父母)를 잃은 듯 슬퍼하여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세웠 다.
대사성(大司成)으로 풀어 주시니 세상에 참 선비 얻었다 하였다.
신축년(辛丑年)에 좌부 빈객(左副賓客)을 겸직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옮겼다. 대사헌(大司憲)시절에 영남 (嶺南)의 선비 문경호(文景虎)가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여 사류(士類)를 무찌르려는 계획 을 상소하고, 기자헌(奇自獻)이 이에 동조하니 공(公)이 한껏 변론, 해명하다가 오히려 체직 이 되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전출되었다.
임기가 끝나 돌아오니 다시 호조참판겸동지춘추 관사(戶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직하였다.
정미년(丁未年)에 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전출되었다.
광해초(光海初)에 공(公)이 전왕 (前王)의 조정에서 경정(經 )의 옛 신하였다는 것으로 대사간(大司諫)으로 불러 들였다가 대사헌 부제학으로 옮겼다.
그 때 대사간(大司諫)이 결원이 되므로 수상(首相)이원익(李元 翼)이 각망(各望)을 참작하여 세 사람을 천거하였더니, 광해군(光海君)이 세 번 물리치고 끝 내 친척(親戚)으로 맡게하니 여론이 비등하니 임곤(任袞)과 박여량(朴汝樑)은 현인(賢人)을 들어 쓰는 데는 특정이 없다는 말을 들어 해명하니 공(公)이 옥당(玉堂)에 있다가 상소하여 임(任)·박(朴)을 논척하고 또 조정(趙挺)이 어란(御亂)을 전하지 않은 죄를 논박하니 군소 배(群小輩)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유년(己酉年)에 예조참판이 되고 여름에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광해군(光海君)이 오래도록 경정(經 )을 폐하니, 대중(大衆)의 정(情)이 막히더니 마침 대신(大臣)의 인대(引對) 가 있어, 공(公)이 역시 입시(入侍)하여 극히 부당함을 말했더니 광해군(光海君)은 기꺼이 받아 들였고, 상신(相臣)을 바라보면서 조정의 저작이 부정하니 대신들은 이 뜻을 알아 경박 하여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쓰지 말라 하였다.
재상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이는 실로 지금의 고질이니 비록 현신(賢臣)이 맡더라도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공 (公)이 말하기를 『조화롭게 진정(鎭靜)할 책임은 대신들에게 있고 대신들이 그 직분을 다 하게 하는 것은 임금님이 책임입니다.
근래 국가(國家)에서 사람을 쓰는 데 대신(大臣)들이 미리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큰 폐단입니다.』말씀이 심히 엄정(嚴正)하니 선비들의 논 란이 식더라, 명조(明朝)에서 선조(宣祖)의 제천사(祭天使)로 태화(態化)를 보내어 예관(禮 官)이 「종(宗)」의 칭호를 숨기고 은밀히 계청(啓請)하여 가짜 신주(神主)를 만들고자 하니 공(公)이 예관을 탄핵하되, 천자(天子)가 사신을 보내어 제사하는 것인데 이 무슨 일로 감히 가짜 신주(神主)를 진설하여 제향하게 하느냐 하니 논의가 가라앉았고, 논의하던 자들도 탄 복하였다.
사직하고 대사성으로 체직되었고, 가을에 또 대사헌이 되었다.
십(十)월에 대부인(大夫人) 의 상를 당했다. 신해(辛亥)에 상을 마치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
임자년(壬子年) 봄에는 대사간(大司諫) 대사 성(大司成) 춘추관사(春秋館事) 까지 겸해서 맡았다.
공(公)이 당시의 일이 날로 그릇됨을 보고, 영환(榮宦)에는 뜻이 없어 한결같이 외직(外職)을 원하여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 다.
조정(朝廷)을 시작하던 날 광해군(光海君)이 인견(引見)하니 공이 조정안 붕당의 화를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이르되, 『하북(河北)의 적(賊)을 제거하기는 쉬워도 붕당(朋黨)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하니 그렇지 않겠는가.』하니 공(公)이 정색(正色)하고 말하되, 『이는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입니다.
인군(人君)이 먼저 본원(本原) 의 바탕을 세워서 사정(邪正)을 분별하면 당화(黨禍)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하며 이에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功夫)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건극(建極)의 설명을 명백하게 펴냈다.
이에 이덕성(李德聲)이 나와서 사람들에게,『대신(大臣)은 반드시 유신(儒 臣)으로 등용(登用)해야겠더라.
홍(洪) 아무개의 경정(經 )에서의 논리는 우리로는 따를 수 없더라』하였다.
당시에 적신(賊臣)들이 이미 집권을 하여 사당(社黨)으로 뿌리 내려 거취 (去就)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임소(任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사의(辭意)을 올렸으나 체직되지 않았다.
일찍이 조그마한 축대가 송추(松楸)를 쳐다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임기가 차자 곧 바로 돌아 와서 물 가에 한 정자를 구축하고, 날마다 이웃의 친척과 시주(詩酒)를 즐겼다.
어쩌다 조정(朝廷)의 시비 (是非)나 관장(官長)의 득실(得失)을 말하는 이가 있으면 곧 손을 흔들어 제지하였다.
계축 년(癸丑年)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망극하니 밤새 잠을 이루지 않고, 어쩌다가는 눔물 이 옷깃을 적시면서, 『내 일찍 이런 꼴 보지 않으려 했는데』하셨다.
을묘(乙卯) 사월(四月)에 병이 나시자 성(城) 서(西)쪽의 옛 댁으로 돌아 오셔서 약을 물리 치고 말씀하시되 『사생(死生)은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이걸 먹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 겠느냐』운명 직전 까지도 의기(意氣)가 평안하시어 친우(親友)와 이별하면서 완전함을 얻 어 돌아 가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구(九)월 십구(十九)일에 돌아 가시니 춘추(春秋) 는 육칠(六七)이었다.
고양(高陽)의 고봉(高峯) 밑 신좌(辛坐) 을향(乙向)에 장례하시다.
공(公)은 타고 나신 기품이 수미(粹美)하시고, 효도와 우애가 가정스러워 아들의 직책을 한결같이 성인의 가르침에 따랐다.
매일같이 닭이 울면 세수하고, 부모님 처소로 가 문안드 리고, 진지 상을 드리고 물러와 책을 읽곤 하였다.
찬성공(贊成公)이 늙게 풍병(風病)에 걸 리시니 병장(病狀)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약을 드리고, 의사를 보면 반드시 절을 했고 눈 물을 흘렸다.
옷을 벗고 자는 일이 없기 십(十)여 년에 끝내 좌환이 정상으로 돌아가 건강하 게 종명(終命)하셨으니, 사람마저 효성의 영감이라 하더라. 상을 당하여 피나게 우시기 삼(三)년, 상복을 벗는 일이 없고, 슬퍼하시기가 거의 실성하 실 지경이었다. 가세(家勢)가 가난하고 아우들이 약하여 멀리 갈 수 없으매, 공(公)이 시병(侍病)하는 틈 에 두 아우를 거느리고 학업(學業)을 전하여, 혹은 매를 치면서까지 경계하여 성곡하게 하였 고, 부모(父母)가 재세(在世)하실 때에 과거를 해서 영광을 보여드리게 하였다.
가산(家産)을 나누어 줌에 있어서는 좀 나은 것은 모두 주었고, 조카들을 자식처럼 사랑했으며 결혼의 비 용도 모두 자담(自擔)하셨다. 외로운 이를 항시 집 안에서 돌보았고 친척에게는 멀고 가까움 이 없이 대했으며, 상제(喪制)에는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제사에는 바드시 목욕을 하 시며, 비록 병환이 있어도 거르시는 일이 없었다.
본성이 소박하시어 사치를 물리치시며, 항 상 자제들에게 이르시되, 『가세(家世)가 쇠체(衰替)하다가 내게 와서 이런 영화를 받는 것 은 오직 조선(祖先)들이 적덕(積德)한 덕택이니 너희들은 친구를 가리어 사귀고, 말을 삼가 며 평의(評議)를 좋아하여 사당(私黨)을 만들어 이름내고 진로(進路)로 삼는 일이 절대로 없 어야 하겠다.』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옛 가르침에 잠겨 심신(心神)을 거두어 종일(終日)토록 게으른 모습 을 보이지 않았다.
공무(公務)에서 물러나신 이후로는 사람들과의 왕래(往來)를 끊으시고, 객(客)이 와서 자 리를 같이 할 때는 혹 기꺼이 마셔 취해도 곧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평생에 서두르는 말이나 황급한 빛이 없으니, 비록 환란이 창황할 때라 사무에 혼란하실 때라도 적기(積氣)가 웅용하시며 조처하심이 밝고 자상하시고 겸손으로 스스로 거두시었고, 남과 대비하는 일이 없고, 시비공사(是非公私)의 판단에 있어서 한 마디라고 고의(古義)를 본받아 의연(毅然)히 그 기개를 빼앗을 수 없다.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어서 처신접물(處身接物)이 처음 마음과 같이 일찍이 변하는 일이없 고, 안으로 감추고 남에게 알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 안에서의 지극하신 행동 이 이웃에게는 알려지지가 않았다.
대저 공(公)은 학문에 사우(師友)의 전통(傳統)이 있어 항시 마음 공부에 힘써 몸가짐이나 말씀에 반드시 이치에 맞기를 바랐고, 관(官)에서의 일이나 조정에서의 언론에 모두 연원(淵 源)이 있어 배운 것에 어긋남이 없었다.
항시 탄식하시되, 『어려서 배우기를 즐겨 거의 깊 은 경지에 갔다가 중년(中年)에 벼슬살이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늙어서 이룬 것이 없으 면 이는 배우는 이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선조(宣祖)를 만나 여러 차례 은혜로운 포장을 받고, 심지어는 강관(講官) 중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정대(庭 對)에 연이어 수석(首席)하여 일찍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문명(文名)이 자자하였으니, 명망 (名望)과 사실이 겸전하였다.
그러나 끝내 문장(文章)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다.
아드님 ?이 원종일등훈(原從一等勳)이고, 손자(孫子) 주(柱)는 원귀(元貴)로 여러 차례 증 직(贈職)이 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부인(夫人) 김씨(金氏)는 안동(安東)의 명망있 는 집안으로 고려기(高麗期)의 시중(侍中)인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조(祖)는 춘(春)이니 무 주현감(茂朱縣監)이고, 아버지는 고언(顧言)이니 장흥부사(長興府使) 유충정(柳忠貞)의 따님 을 얻어 가정갑인(嘉靖甲寅)에 부인이 태어나시었다.
온유하시고 현숙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라 부녀의 일을 배우지 않아도 잘 하셨다.
공(公)의 가문으로 시집오셔서 웃어른 섬기는 일을 예법으로 하셨다.
공(公)의 집이 가난하였기에 집안살림을 친히 하면서 손수 음 시를 장만하여도 군색한 빛을 보이지 않으셨다.
시집와서 늙기까지 또한 구히 되어 명부직 (命婦職)을 받고 자손들이 그득하여 부도(婦道)를 지키시기 한결같이 하셨다.
일가에 우애하 고, 아랫 사람 부리는 것에도 모두 법식을 갖추시어 규문(閨門)이 마치 조정(朝廷)처럼 엄숙 함이 있어 복스러운 어머니 대접을 받았고, 아들 또한 많이 두시어 세상에서 현부인(賢婦人) 으로 칭찬되었다.
공(公)이 돌아가심에 슬퍼하심이 지나쳐 겨우 돌만에 돌아가시니 공(公)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공(公)이 육남이녀(六男二女)를 두니, 맏이는 방 으로 가선부인(嘉善夫人) 대사간(大司諫) 이고, 다음은 입( )으로 문과첨지(文科僉知)이고, 다음 ?는 문과(文科)로 장령(掌令)이고, 다 음은 영(霙)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이고, 다음 ?는 음덕(蔭德)으로 수참판관(水站判官)의 보 직을 받았고, 다음 ?은 진사(進士) 개성도사(開城都事)였다.
따님은 참봉(參奉) 이경유(李敬 裕)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지평(地平) 조공숙(趙公淑)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예조정랑(禮曹正 郞) 허계(許啓)에게 시집갔다.
방이 일남삼녀(一男三女)를 두니 남(男) 주일(柱一)은 새로이 문과(文科)에 올랐고, 여(女)는 판관(判官) 윤탄(尹坦)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제방(祭訪) 윤?(尹?)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한 종서(韓宗緖)에게 출가했다.
입( )은 아들이 없어 영(霙)의 아들 주후(柱後)로 양자 하였다.
?는 일녀(一女)를 두니 허제(許 )에게 출가했다. 영(霙)은 오남사녀(五男四女)를 두니 맏 이 주원(柱元)은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취하여 영안위(永安尉)가 되었고, 다음은 주훈(主勳) 이다. 따님은 이준구(李俊耉)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진사(進士) 이시술(李時術)이고, 다음은 이항진(李恒鎭)에게 출가(出嫁)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는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으니, 따님은 박종부(朴宗缶)에게 출가했고, 아들 주하(柱 夏)는 생원(生員)이다.
?은 사남이녀(四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 맏이가 주건(柱建)이고, 나멀지는 어리다.
이경유(李敬裕)는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몽익(夢翼), 딸은 생원(生員) 백 상빈(白尙賓)에게 시집갔다.
조공숙(趙公淑)은 일남이녀(一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형(世馨)이고, 따님은 이유형 (李惟馨)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권유(權?)에게 시집갔다.
허계(許啓)가 이남일녀(二男一女)를 두니 따님은 이경휘(李敬徽)에게 출가했다.
한종서(韓 宗緖)가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다. 세형(世馨) 이유형(李惟馨)은 모두 이남(二男)을 두고, 주원(柱元)이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고 허제(許 )가 삼남(三男)을 두고, 이몽익(李夢翼)이 아들 진발(震發)을 두고, 박종부(朴宗缶), 이준구(李俊耉), 이시술(李時術)은 모두 일남일녀 (一男一女)를 두었고, 이?가 일남(一男)을 두고 권?가 일남(一男)을 두고, 진발(震發)은 이남 (二男)을 두니 어리다.
내외(內外)의 손자가 칠ㅇ여인(七ㅇ餘人) 오! 선비가 영화로운 길을 만나 좋은 이름을 얻는 것이 비록 때를 만나 드날기거나, 혹은 명예를 훼방받는 경우도 있다.
허나 공(公)과 같은 이는 조정에 있기 40년에 항상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받아, 사람마다 공(公)으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비곡 여론이 빛나가 더라도 공의 생애는 엿볼수가 없었다.
위기(危機)가 여러 차례 있었어도 감히 공(公)에게 잘 못을 씌우지 못했다.
만년(晩年)에는 모든 일을 사양하고 한가이 거하여 스스로 진퇴(進退)의 지조를 가저, 어 려운 때에도 순리로 대처하여 남의 속박을 받지 않고 홀로 온전한 이름과 절개를 지켜 평안 히 가셨으니, 비록 공(公)에게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하고 수(壽)를 더 오래하셨더라도 이러 한 지조는 바꾸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는 공의 평생의 의지를 임종하시던 때의 말씀으로도 알 수가 있다..
자손들이 모두 가훈(家訓)을 지켰고, 네 아들과 두 사위가 이어 대과(大科)에 올라 관복 (官服)이 빛나고 위품이 늠름하니, 하늘이 공(公)에게 베푼 것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명(銘) 을 하되, 선조(宣祖)가 사람을 쓰시니 인재(人材)가 무리로 일어나다.
누구를 기다려 유독 쟁쟁한 많은 선비가 몰렸던가, 오직 공(公)이 정대(庭對) 하신 말을 임금님도 『아름답다』칭찬하셨 네. 신하의 직분으로 도움뿐 아니라 문장(文章)도 화려하셨다.
덕행(德行)과 정사(政事)에 제 대로 안하심이 없다.
성대(盛大)한 강정(講 )에는 임금도 허심탄회하셨다.
이에 천관(天官) 으로 사랑받고 현신(賢臣)의 길로 지목되도다.
수각(壽閣)에 계셔 국가의 기강이 삼엄했고, 지방장관(地方長官)으로 임용되어서는 능숙한 처사 미흡함이 없었다.
모든 선발의 대상에는 공(公)이 반드시 우선으로 꼽혔다. 어찌 공(公)이 는하기만 했으랴. 선조(宣祖)께서 공(公)을 아셨다. 공(公)은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솔선하여 몸소 하심이라. 잘못 을 바로잡고 행신(倖臣)들에게 항론(抗論)하시다.
혼탁한 조정에서 기미를 알아 함정에 빠짐 을 면하게 되다.
만년(晩年)에 전원(田園)에 있어 시서(詩書)로 만족하시다.
대저 공(公)의 평생은 모두가 학문의 힘이었다.
명계(明啓)하게 몸과 이름을 지켜, 살아서나 죽어서나 평안 하시다.
다하지 못한 것은 하나의 경(經)으로 남겨 주셨다.
내 이 가정을 살펴 보니 벼슬아 치가 그득하구나.
더욱 공(公)의 덕이 빛날 것을 알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