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일완(一玩) 홍범식(洪範植) 선생 (1871. 7. 23~1910.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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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10 태인군수, 금산군수
.1910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순절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중에서(1910. 8. 29) -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국치의 날에 자결, 순국한 열사이다. 즉 자신의 생명을 던져 ‘한일합방’에 대한 민족의 분노와 저항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의열투쟁이라고 한다. 의열투쟁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 침략자나 그 앞잡이를 처단하거나, 침략 행위에 대해 항거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말한다. ‘의열’이란 원래 의사, 열사의 과감하고도 자기 희생적인 행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의사’란 성패에 관계없이 침략자와 불의에 대해 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람을 말하고, ‘열사’란 강력한 항의의 뜻과 의지를 자결 또는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표출한 사람을 가리킨다.
일제에 대한 의열투쟁은 한말 국망의 위기 속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의열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의열투쟁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전개됨으로써 한국인들의 독립의지가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같은 의열투쟁의 전통은 일제시기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에 의해 계승되어 더욱 꽃피게 되었고,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한 방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1904년 2월 8일 일제는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런 다음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2월 23일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였다. 일제는 이에 의거하여 한국의 군사 요충지에 일본군을 주둔시켰고, 나아가 서울에 ‘한국주차일본군사령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사들이 나타나 일제와 매국 조약을 체결한 외부대신 이지용과 외부 교섭국장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의열투쟁의 불꽃을 지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일제 침략자에 대한 의열투쟁은 있었다. 1896년 2월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알고 처단한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로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의열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이 구국운동, 나아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일의정서」로 한국에 대한 정치, 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곧 이어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된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이었다. 흔히 「제1차 한일협약」으로 알려진 이 협정은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고문정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일제는 이와 같이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정치,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면서 한국의 재정, 외교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갔다. 나아가 하야시 일본 공사는 광무황제를 위협하여 재외 한국공사관의 철수를 명령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간파한 주영공사 이한응은 귀국을 미루면서 임지에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국권회복은 물론 자주적 외교조차 불가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한응은 1905년 5월 일제의 한국침략을 비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런던에서 음독, 자결하고 말았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뜻과 국권회복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이로써 의열투쟁은 국외로까지 확대되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은 의열투쟁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켜 갔다. 「을사조약」으로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인 통감이 부임하게 되어 자주적 통치권조차 위협받는 국망의 상황을 예상한 결과이다.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발표하여 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에 동조한 내각 대신들을 매국적으로 질타함으로써 저항운동의 파고를 고조시켰다. 특히 연이은 전.현직 관료의 자결, 순국 투쟁은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전국적인 구국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발전시켜간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등은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건의가 관철되지 않자 자결, 순국하였고, 그럼으로써 의열투쟁은 물론 구국운동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이들의 뒤를 따라 전 참판 홍영식과 학부 주사 이상철도 자결, 순국함으로써 의열투쟁은 이제 일제 침략 세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투쟁 방략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리하여 성난 민중들은 조약 체결에 앞장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집을 습격 방화하기도 하였고, 농민 원태우는 안양역에서 침략 원흉 이토오의 처단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나철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대신들의 처단을 기도하고, 친일 활동을 일삼던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구국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국외에서도 재차 의열투쟁이 발생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준이 분사(憤死), 순국함으로써 의열투쟁의 기상을 떨친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사로 파견된 이준은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국권침탈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대표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 만방에 알렸으나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울분을 이기지 못한 이준은 1907년 7월 분사, 순국하고 말았다. 이준의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은 언론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졌고, 그에 따라 그가 이루고자 했던 뜻도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의 체결을 강제하였다. 그리고 그 부수각서에 의해 군대마저 해산시켜 민족의 무력을 말살시켜 갔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던 1907년 8월 1일,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군대 해산에 반대한 이러한 박승환의 의열투쟁은 일제에 대한 무언의 공격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시위대 장병들은 서울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함으로써 강렬한 민족의식을 표출하고, 민족 군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나아가 이들의 봉기는 해산군인들의 의병합류의 계기가 됨으로써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켜 간 견인차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한인 독립운동가에 의해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에 의해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고용되어 친일 활동을 일삼던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이 처단한 것이다. 한말 의열투쟁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오를 처단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하였다. 인류의 양심과 민족의 정의를 실현한 것이 바로 안중근 의거였다. 따라서 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던 중국을 비롯한 피압박 민족국가로부터 큰 지지와 찬양을 받았다. 그리고 민족을 각성시켜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을 활성화시켜 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 의거 직후 일어난 이재명 의거가 그것을 말해준다. 안중근이 을사조약의 일본측 원흉인 이토오를 처단했다면, 이재명은 한국측 원흉인 이완용의 처단을 기도한 것이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명동성당 앞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단검으로 공격하였다. 비록 중상에 그쳐 처단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뜻은 이미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이 민족적 대의와 정의를 실현하고, 말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으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열투쟁인 것이다. 경술국치 직후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선생을 비롯한 황현, 김도현, 이만도, 김석진, 송병순 등의 의열투쟁도 그러한 것이었다. 특히 선생의 자결, 순국 투쟁은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된 바로 그날에 결행되었고, 이후의 의열투쟁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선생은 1871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일완, 자는 성방(聖訪)이다. 선생의 가문은 세도세자 비빈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집안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가운데 하나였다. 직계 가족 또한 조부 홍우길은 185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부친 홍승목은 187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한 집안이었다.
이같은 명문대가의 후예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며, 충효의 의리와 절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익혔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로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데는 후덕하게 하며, 성정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선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2년에는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혜민원 참서관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선생은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는 매우 비분강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충정공(민영환)은 좋은 일을 이루었다”고 동경하면서, 그와 같이 절의를 지키기로 다짐한 듯하다. 그러던 중에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태인군에서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태인군수로 부임한 선생은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 나아가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일체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시행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이에 감동한 군민들이 마을마다 송덕비를 세워 그 수가 38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선생의 인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도 정주시 산외면 오공리 야정 마을에 남아있는 「군수 홍범식 선정비」이다.
1909년 선생은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행정(爲民行政)을 폄으로써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시기 조국의 운명은 망국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의병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일제는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한 의병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함으로써 한국 병합의 최대의 장애 요소를 제거한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일제는 한국 병합의 시기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때 터진 것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처단 의거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한국 내의 주요 민족운동자들을 체포, 감금함으로써 계몽운동의 지도 역량까지 약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해 12월 이재명 의사에 의해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기화로 본격적으로 ‘한일합방’ 정책을 추진하여 갔다. 즉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곧 바로 일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합방’에 관한 상주문과 청원서, 성명서를 발표케 하였다. 마치 한국 민족이 ‘한일합방’을 원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작하여 간 것이다.
나아가 이듬해 5월에는 병약한 소네 통감을 경질하고 일본 정부 내에서 과격파에 속하는 현역 육군대장인 데라우치를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 6월에는 한국의 경찰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협정을 체결케 함으로써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이제 한국정부는 외교, 군사, 사법권에 이어 경찰권까지 빼앗긴 껍데기만 남은 정부가 된 것이다.
데라우치 통감은 이같은 토대 위에서 1910년 7월 부임하여 오자마자 곧 바로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일합방’에 관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는 해외공관에 훈령을 내려 ‘한일합방’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한 외교 활동에 나섰다. 주영 일본대사로 하여금 영국정부와 접촉하여 합병에 대한 양해를 얻도록 한 것이다. 또 주러시아 일본대사로 하여금 러시아 정부에 합병의 내용을 통고하고, 아울러 노령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의 반발에 대비하여 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제가 제국주의 열강과 벌였던 국제적 거래를 이 시기에도 다시 성사시켜 간 것이다.
이제 ‘한일합방’은 시간만 남기고 있었다. 데라우치는 8월 16일 이완용에게 ‘한일합방조약’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8월 18일 각의와 8월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한일합방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황제로 하여금 공포케 한 것이다. ‘한일합방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살펴 상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를 위해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사내정의를 각기 그 전권위원으로 임명함. 이에 따라 이 전권위원은 회동, 협의하여 다음의 제조문을 협정함.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함.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인함.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그것을 약속함.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 황제와 그 후예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함.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에 대하여 특히 표창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서 영작을 주고 또 은급을 수여함.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전연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에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충실히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하는 한 한국에 있어 제국관리에 등용함.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선생은 금산군수로 재임 중에 이같은 ‘한일합방’ 조약의 조인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이 하였다. 그리고는 자결,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8월 29일 드디어 ‘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되자 이날 저녁 선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상자를 하나 주어 집으로 돌려보낸 뒤, 관아의 객사로 갔다. 그리고 시종하는 고을 사령을 밖에 머물게 하고는 객사 안으로 들어가 북향하여 황제에게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였다. 이때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이 통곡하며 만류하자 선생은 화를 내며 그를 밀치고 다른 곳으로 향해 갔다. 고을 사령이 다시 뒤따라가자 선생은 그에게 모래를 뿌려 앞을 못보게 한 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집으로 간 김지섭은 선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에 경악한 김지섭은 선생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선생을 찾고 있던 고을 사령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객사 주변을 나누어 수색하던 중 “여기 나으리가 계시다”라는 외침을 듣고 달려가 보니, 선생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자는 듯 편안한 자세였다고 한다.
순국 당시 선생의 나이는 갓 마흔에 불과하였으니, 그 애절하고 원통함이 더욱 컸다. 선생이 품고 있던 유서는 염탐하던 일본인이 탈취해 갔으나, 김지섭에게 미리 맡겨 놓은 것은 장남에게 건네졌다. 유서는 모두 10여 통으로, 선생의 조모를 비롯하여 부친과 부인, 그리고 여섯 명의 자녀와 장손에게 남긴 것이었다. 특히 선생은 장남에게 남긴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