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1815년)는 조선의 추존왕비로, 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735년에 반송반에서 홍봉한(洪鳳漢)의 둘째 딸로 태어나, 영조 20년인 1744년에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정조가 있다.
대체로 남편과 금실이 좋은 편이었으나, 1762년에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고, 얼마 뒤,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히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남편이 참담한 형벌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홍씨는 남편을 구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뒷배였던 아버지인 영의정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洪璘漢)은 모두 사도세자에 반대하는 노론에 소속되어 있었다. 세자의 장인이던 홍봉한은 영조의 노여움을 살까봐 적극적으로 세자를 구명하지 않았고, 속해있던 당파인 노론의 외척과 비외척 간의 파벌 싸움과, 사도세자의 노론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나오기는커녕,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뒤에, 사도세자는 아사(餓死)하였다. 일부에서는 헌경왕후를 남편을 구할 생각은 별로 없었고, 오로지 친가의 명예와 세손인 정조밖에 모른 비정한 아내로 비판하고 있다.[1]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자, 홍씨에게 '혜빈(惠嬪)'을 추서하였다. 1775년에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세손의 외조부 홍봉한도 소극적으로나마 반대하였다.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면, 무사치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씨는 아버지와 숙부에게 대리청정은 반대하지 말아달라 간곡히 부탁하였다. 하지만 홍봉한 형제는 계속 영조 앞에서 세손을 음해하여, 홍씨의 마음 고생은 심했다.[2]
1776년에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1795년 그녀가 회갑을 맞는 해에,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서 궁중문학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훌륭한 회고록이라는 평가와 단지 자신이 사도세자의 죽음 때 어쩔 수 없이 수수방관했다는 변명과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던 그녀의 집안의 명예 회복을 위한 말 등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한 여인의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두 개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평가가 있다.[3]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15년 뒤인 1815년에 창덕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899년에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에 장종이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묻혀있으며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위치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