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 *1997년 10월 *논문(문학사상) - lt5(literary thought 5) 김승환(충북대학교 국어과 교수) 1.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를 연구하는 관점 세계사는 봉건사회에서 근대시민사회로 이행하는 보편적인 길을 걸었다. 물론 이 관점은 서구(西歐)를 중심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기도 하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봉건사회는 근대시민사회로 이행해야만 했고, 또 그렇게 이행했음은 사실(史實)이 보여주고 있다. 봉건절대주의에서 근대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역사의 명령이었고 조선 역시 그러한 과정으로의 진행이 예상되었지만 제국주의 열강(列强) 의 침탈(侵奪)로 인하여 그러한 보편적인 역사발전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다 알다시피 조선봉건사회에서 근대시민사회로 이행하려 할 때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 들이 조선을 유린(蹂躪)함에 따라서 조선의 역사는 특수한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 한 역사의 이행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거니와 이 런 점에서 우리는 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를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두 분의 신분(身分)은 양반이었다. 단재는 몰락한 양반 고령 신씨의 후예였고, 벽초는 증 조부 홍우길(洪祐吉)이 이조판서, 조부 홍승목(洪承穆)이 참판, 부친이 경술국치 때 금산군수 였다가 자결한 홍범식(洪範植)으로 사대부 당상관의 풍산 홍씨 문중의 후예였다. 그런데 이 들은 양반계층의 세계관, 즉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진보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 의자, 사회주의자로 각기 자신을 다듬고 도슬러 나갔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당시 대다수의 양반계층은 잃어버린 왕조(王朝)에 대한 비탄(悲嘆)에 빠져 있었고 과거지향의 복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1905년을 전후한 애국계몽기에 의병창의 기치 (旗幟)를 들던 양반들도 없진 않지만 더 많은 양반들은 국권(國權)이 일제의 마수에 넘어가 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절히 식민통치에 동화(同化)하면 서 살았다. 그렇지만 민중사관을 갖게 된 신채호나 '양반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한'1) 홍명 희는 양반계층이 걸어간 보편적인 길을 걷지 않고 특수한 길을 걸어갔다. 물론 벽초가 사대 부 계층의 윤리의식과 문화의식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이념과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는2) 평가는 단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들 선각자를 연구하려면 분석주의적 연구방식이 아닌 다른 연구방식이 필요하다고 본 다. 문학연구의 방법은 작가의 작품 창작과 마찬가지로 연구가의 일정한 관점, 보다 정확히 는 그의 세계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를 정신사적 연구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한국 근대문학은 학문이자 동시에 연구자의 실천적 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자각'3)은 꼭 필요하다. 그것을 논자는 민족주의적 국학연구 방법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민족주의적 국학연구는 분단이라는 민족모순과 제3세계적 규정성 등을 특별히 인식할 때 성립하는 연구 방법이다. 단재와 벽초를 연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민족주의적 국학연구 방식에 따라야 할 것으로 믿는다. 2.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 1)단재와 벽초의 관계 단재와 벽초의 우의(友誼)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단재가 벽초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두 분의 우의가 어떠했는지 잘 알려준다. 산 같이 쌓였던 말이 붓을 잡고 보니, 물같이 새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부터 써 야 할는지요. 세전(歲前)인가 언제 서중(書中)에 「홍선생은 검사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한, 두미(頭尾) 모르는 소식을 들었더니 지금도 형이 그 곳에 계신지요. 제(弟) 불원간 아마 십 년 역소(役所)로 발정(發程)할 것이니, 아 - 이 세상에서 다시 면목(面目)으로 상봉하게 될 는지가 의문입니다. 형에게 한 마디 말을 올리려고 이 붓이 뜁니다. 그러나 억지로 참습니 다. 참자니 가슴이 아픕니다마는 말하련즉 뼈가 저립니다. 그래서 아픈 가슴을 부등키어 쥐 고 운명이 정한 길로 갑니다.4) 칼날같고 북풍의 서리 같던 단재가 이처럼 저린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죽을 운명을 예감(豫感)했기 때문이며, 그 상대가 홍명희(1888 - 1968)였기 때문이다. 여덟 살 연 상(年上)인 살천스럽던 단재(1880 - 1936)가5) '제(弟)'라는 겸양(謙讓)을 표한 것도 벽초의 인간 됨됨이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언제 쓰여졌는가는 편지 뒷부분이 유실(遺失)된 관계로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홍명희가 검사국으로 넘어간 다음해라는 것은 분명하다. 홍 명희가 신간회 활동으로 인하여 검사국으로 넘어간 것은 1930년. 위 내용으로 미루어 이듬 해인 1931년 단재는 옥중에서 이처럼 애절한 편지를 썼을 것이다. 십 년 역소로 발정(發程) 한다는 것은 대련에서 여순(旅順) 감옥으로 이감된다는 것이고 이 글에는 그러한 와중의 1932년경의 심경이 드러나 있다. 단재는 이처럼 속내를 드러내 놓는 법이 드물었다. 그렇다 면 단재가 벽초에게 하고 싶었던 '한 마디 말'이란 무엇이었을까. 참자니 가슴이 아프고 말 하려니 뼈가 저린 그 말은 무엇이었을까. 오래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그것은 국권회복, 자주 독립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명제는 두 가지. 첫째, 반제 항일 투쟁을 통한 자 주독립국가의 건설 둘째, 반봉건 근대 시민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 이들 두 분 은 두 가지의 민족적 명제를 실천함에 있어서 같은 길을 걸어간 동반자. 그렇다면 단재와 벽초는 언제 만났을까? 이 점은 두 분 모두에게 중요하며, 각자에게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어린 시절 괴산(槐山)에 살던 벽초가 귀래리의 단재를 찾아간 것으로 알 려져 있으나 이것은 전혀 낭설(浪說)이다. 1936년 벽초 홍명희는 <나는 24,5년 전에 중국 상 해에서 단재를 처음 만났습니다>6)라고 써 둔 것으로 미루어 1911년 또는 1912년에 처음으 로 만났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만남은 한국근대사의 중대한 사건이기까지 한데 벽초는 단재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회상(回想)을 남겨 놓고 있다. 단재(丹齋)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 하고 슬그머니 죽 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知己)로 허(許)하 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 상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7) 북경서 달포 동안 단재와 교유(交遊)하는 중에 비로소 그의 인물을 잘 알았습니다. 단재가 의론(議論)에 억양(抑揚)하고 행동에 교계(較計)가 적으나, 억양이 과한데 정열이 있어 좋고, 교계가 적은데 속기(俗氣)가 없어 좋았습니다. 단재가 고집세고 괴벽(怪癖)스럽다고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단재의 인물을 잘 알면 고집이 맘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이 눈에 거칠지 않았을 것입니다.8) 단재의 서거(逝去)를 전해 듣고 적은 글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단재뿐만 아니라 벽초의 인품도 읽을 수 있는데, <나의 오십반생에 중심(中心)으로 경앙(景仰)하는 친구>라던 단재 의 죽음을 두고 이토록 초연(超然)하다는 것은 벽초가 매사에 진중(鎭重)한 성품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우리는 단재의 유별난 언행(言行)을 엿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벽초의 단재에 대한 흠모(欽慕)를 엿볼 수 있다. 당대의 인물을 논하는 자리에서 모두를 기껏 능재 (能才)로 평하던 벽초가 단재만은 '천재적 안광', '죽고 난 뒤에도 영원히 살아있는 인간'으 로 최고의 찬사(讚辭)를9) 보낸 것만 보아도 벽초의 단재에 대한 존경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북경(北京)에서 달포 동안을 함께 지냈다하니 이 때가 1918년 단재가 39세, 벽초가 31세였다. 단재는 당시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칩거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 고 북경의 권위지 『중화보』에 논설을 게재하고 있었다.10) 한편 1918년 7월 귀국한 벽초는 향리 괴산에서 은거하다가 이듬해 삼일만세를 맞이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했다가 의병장 한봉수와 함께 의암 손병희를 방문하고 괴산으로 내려온 그는 1919년 3월 19일 '괴산만세시위사건'을 주도했다. 네 번에 걸친 만세시위에는 수백 명에서 천오백 명에 이르는 대군중이 경찰서와 군청을 점 거했는데 이러한 거사(擧事)는 농촌 지역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벽초는 괴산만세운동의 주모 자였다. 당대(當代)로 말하면 큰 죄를 지은 것이고 현재에는 말할 것도 없이 애국적인 거사 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향리(鄕里) 괴산에 서 있는 삼일운동기념비에는 벽초 홍명희의 이름은 빠져 있으니 역사는 무심한 것인가? 3년형을 언도받은 벽초는 1년 반 동안 서대문형 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다. 논자는 벽초가 괴산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한 것이 단재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 다. 이미 밝혀진 것과 같이 홍명희는 괴산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했고 그로 인하여 1년여 옥 살이를 한 바 있다. 궁벽(窮僻)진 시골 괴산에서 일찍이 만세의 기치(旗幟)를 올릴 수 있었 던 것은 홍명희의 민족해방에 대한 역사적 안목과 세계관 때문이겠으나 그 세계관에 끼친 단재의 영향은 실로 지대했을 것이다. 홍명희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상층 부르조아 민 족주의자들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지 않으나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사회주의 내지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민족개량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 것도11) 단재의 영 향이 컸음을 알려준다. 홍명희가 달포 동안 함께 기거했다고 술회(述懷)하던 1918년의 단재는 북경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교유하던 때이며 사회주의 혁명 또는 무정부주의의 노선이 조선의 혁명에 적합하다고 믿고 있던 때다.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창한 민중의 직접혁명이 라는 것이 실은, 식민지 치하의 조선백성의 혁명 즉 민족 전체가 민중인 상황에서의 직접혁 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경에서 머물던 국외자의 인식이고 국내에 머물 던 벽초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의 민족해방노선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령 민중 직접 혁명으로서의 삼일운동을 벽초가 생각했더라도 손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비폭력 방식을 택해야만 했던 현실의 벽은 두터웠다. 단재의 사상에 동의(同意)하되 현실적인 노선을 택해 야 했던 벽초의 그리고 당시의 한계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단재의 민중 직접혁명론이 벽초의 수작, 「임꺽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는 사실이다.12) 명종조 시대의 도적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수많은 역사의 소재 중에서 유별나게 천민 백정(白丁)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홍명희의 민 중적 세계관을 말해주지 않는가? 백정은 식민지적 모순을 가장 많이 떠안고 있는 하층민이 다. 그리고 봉건적 모순 또한 가장 많이 떠안고 있는 계층이다. 제국주의의 수탈과 식민지내 의 상층민들의 수탈을 이중적으로 떠안고 있는 계층이 바로 이 백정이다. 이들 하층민이 가 지고 있는 울분과 정서는 민족단위 노예라는 식민지적 현실 그 자체이므로 「임꺽정」의 민 족문학사적 의의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2)민족문학의 소설사적 흐름, 단재의 역사전기소설과 벽초의 「임꺽정」 「임꺽정」이 조선의 세시풍속사를 그린 세태소설이라는 규정은 서구소설의 이론을 의식 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인데, 결과적으로 그런 요소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임꺽정」의 출 발점만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임꺽정」을 서구소설의 틀 안에서 바라보고 분석하려면 여 러 가지의 문제점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세태소설, 세시풍속사, 사회소설이라는 등의 평가를 내리거나 리얼리즘의 기법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기보다는 전통적인 고전소설의 기법에서 이 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논자는 새로운 소설사의 흐름을 가정해 보고자 한다. ① 이광수 - 염상섭 - 이기영 - 이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아닌, ②신채호 - 홍명희로 이어지 는 흐름을 생각해 보았다. ①을 이광수적 축으로 놓는다면 ②를 신채호적 축으로 놓을 수 있다.13) 두 흐름 모두 내용과 형식의 면에서 과거의 고대소설로부터 연원(淵源)하지만 ①은 일본근대문학에 좀더 다가가 있고 ②는 우리의 고전문학에 좀더 다가서 있다. 「임꺽정」을 1930년대를 풍미한 역사소설로 보려는 관점이나 세태소설로 보려는 관점14)에서 비켜나서 우리 고전문학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는 전기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창작 군담(創作軍談)이나 영웅소설의 면모를 우리는 단재의 역사전기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소설과 전기소설과 영웅소설과 군담소설의 면모가 단재의 작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 다. 영웅의 일생이 고대의 신화 - 서사무가(敍事巫歌) - 판소리계 소설에서 계승되는 바15) 단재의 「을지문덕」과 같은 작품은 바로 이러한 맥을 이으면서 동시에 애국계몽의 자강론 (自强論)을 수용한 것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래서 논자는 소설을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루카치(Lukac's)적 관점16)에서가 아 닌, 우리나라 전통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임꺽정」 의 소설사적 의의는 이야기 양식의 민족문학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 까? 역사소설이나 전기소설이라는 등의 형식적 측면 외에 작품이 이야기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거냥스럽게 넘겨서는 안될 것으로 본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홍명희가 "자, 임꺽정이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쓴다 쓴다 하고 질감스럽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야 쓰기 시작합니다. 각설, 명종대왕 시절에 경기도 양주땅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17) 연산주 때 이장곤이란 이름난 사람이 있었는데 일찌기 등과하여 홍문관 교리(敎理) 벼슬 을 가지고 있었다. 이교리는 문학이 섬무하여 한원옥당의 벼슬을 지내나 항상 말 달리고 활 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신장이 늠름하고 여력이 절등하여 그 재목이 호반(虎班)에도 적당 한 까닭에--.18) 라는 대목에서 유난히 빛난다면 이것은 고대소설이나 판소리의 이야기적 요소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아닐까? 「임꺽정」의 많은 부분들은 판소리의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 있으되, 얼굴로 볼작시면 춘이월 반개도화(半開桃花) 옥빈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 아미간에 비치었다. 앵도순 고운 입은 빛난 당채 주홍필 로 떡 들입다 꾹 찍은 듯, 세류(細柳)같이 가는 허리 봄 바람에 흐늘흐늘--,19) 과 같은 대목이라든가 강담사20) 등이 읽던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임꺽정」이 <전 통적인 서술방식을 계승>21)했다는 것은 고전소설 또는 야담(野談)의 이야기 구성 방식을 차용했다는 뜻이 아닐까? 조선 시대의 강담사(講談師)22) 노릇을 하고 있는 홍명희의23) 이 야기 구연(口演) 방식은 서구 소설의 서술방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근대시민사회 의 서사시로만 분석하고 이해할 것은 아니다. 거칠게 논의한 이 관점에 따르면 벽초의 「임꺽정」은 형식상 전통적인 '전'양식을 모태 로 하고 있으면서24) 공리적 필요에 따라서 구국영웅의 이야기를 보탠 것이다. 단재가 썼고 벽초가 이어받았던 이들 역사전기소설은 영웅소설의 일반적인 요건25)에는 못미치지만, 영 웅대망론을 주장하던 단재가 영웅의 일생을 전(傳) 양식으로 담아내려 했음은 논의할 필요 조차 없을 것이고26) 그러한 의도로 쓴 작품들이 「을지문덕」, 「임꺽정」과 같은 작품이 다. 한편 홍명희는 단편적 이야기를 엮고 묶어서 소설형식의 민중생활사를 쓰면서 한문단편 이나 야담 그리고 단재의 역사전기에서 많은 것을 차용(借用)했다. 이광수가 홍명희의 「임 꺽정」을 '이상한 소설' 정도로 훌걸었던 것은 바로 이 소설사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광수의 작품을 두고 단재는 민중생활과 접촉이 없는 상류사회 부귀가(富貴家) 남녀의 연애정사를 그리므로 위주(爲 主)하는 장음문자(奬淫文字)는 더욱 문단의 수치이다. 예술주의 문예라 하면 현조선을 그리 는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인도주의 문예라 하면 조선을 구하는 인도가 되여야 할 것이 니 지금에 민중에 관계가 없이 다만 간접의 해를 끼치는 사회의 모든 운동을 소멸하는 문예 는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27) 라고 하여 춘원류의 소설을 비판한 바 있다. 춘원이 「임꺽정」을 소설 비슷한 것 정도로 인식한 것이나 단재가 춘원 등의 소설을 장음문자(奬淫文字)로 인식한 것은 같은 논리다.28) 춘원은 근대시민사회의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작품을 썼다면 단재는 근대시민사회를 부정하 는 절대주의적 입장에서 작품을 썼다. 상대주의란 부르조아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서 형성 된 합리주의 정신, 민주주의 태도, 가치중립적 속성을 말한다. 절대주의란 죽고 사는 절대적 인 문제만이 남는 일원론적 관점이다. 이 경우 소설은 살고 죽는 일, 즉 역사사회와 정확히 하나이며 소설은 마땅히 살고 죽는 일에 봉사해야 한다.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전통적 문학 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않고 있는 꼴이다. 바로 이 자리에 단재가 서 있고 뒤이어 벽초가 서 있다. 따라서 단재의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을지문덕」 「이순신전」 등을 근대소설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분석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전혀 다른 틀에서 바라보고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무정」 「감자」 「술 권하는 사회」 「삼대」 「고향」 「날개」 등과는 다른 자리에 단재의 소설 그리고 벽초의 「임꺽정」은 놓여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흐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금오신화 ▼ 홍길동전 ▼ 전우치전 등 군담소설 ▼ 판소리, 판소리계 소설 한문단편, 야담, 전(傳) 이인직의 「혈의루」 등 신소설 ▼ ▼ 단재의 「꿈하늘」 또는 「을지문덕」 춘원의 「무정」 ▼ ▼ 벽초의 「임꺽정」 횡보의 「삼대」, 이상의 「날개」 ▼ 채만식의 「태평천하」 해방 이후의 소설29) 이렇게 볼 때라야 민족문학사의 소설적 의미망을 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춘원이나 횡보의 소설도 고전소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더 많은 영향을 일본을 통한 서구문학에서 배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족의 문학유산을 계승발전시킨 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학의 소설사적 계보임을 시론(試論)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3)'전(傳)' 양식과 「임꺽정」 정병욱 교수 이래로 전통단절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명확히 연속적 인 관점에서 문학사를 재구(再構)하기는 어려웠다. 임화의 이식문학사론을 부정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근대문학이 일본의 명치 대정기 문학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식문학사론을 논리나 평문(評文)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작품으로서 부정 한 것은 벽초 홍명희였다. 벽초는 「임꺽정」의 창작의도를,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지나문학(支那文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 을 많이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 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30) 라고 밝혔다. ①사건은 구성을 말하는 것이고 ②인물은 인물 형상화를 말하는 것이고 ③묘 사는 서술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의 방식에 라보크(Rabock)나 포스터(Forster)류 의31) 소설 이론이 스며들 틈은 없다. 「수호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 역 시 조선적 정조, 즉 삶의 본질이 중국소설과는 다르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우 리 소설의 전통을 표나게 내세웠다. 요컨대 홍명희는 서구소설은 물론 서구소설의 영향을 받은 명치대정기의 일본소설, 또는 중국의 소설로부터 빚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창작의 의식이야말로 민족문학의 전통을 해명하고 전통단절론을 극복할 수 있는 귀중한 대목 아닐까? 임형택 교수가 밝힌 조 선후기 한문단편의 특질이32) 「임꺽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이식문화론과 전통단절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33)는 명제를 우리는 단 재류의 역사전기소설과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찾고자 한다. 그 밖에 「임꺽정」은 이야 기의 구성방식이나 서술의 태도, 그리고 묘사의 방법 등에서도 고전소설의 유산(遺産)을 계 승하고 있다. 4)단재의 민족영웅과 벽초의 민중영웅 자강주의를 주창하던 일제강점 이전의 단재는 영웅과 국민을 애국계몽운동의 주체와 동력 (動力)으로 놓았다. 그렇지만 을사늑약, 경술국치 이후 나라와 국민의 개념은 모호하게 변했 고 '1910년대 국망 후에 민중이라는 말이 국민을 대신하여 주권없는 식민지의 인민을 지칭 하는 용어'로34)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서의 영웅중심주의는 민 중중심주의로 대체되었는데, 이 때의 민중은 식민지 조선인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자강독 립, 신국민설이 민중직접혁명론으로 바뀐 것은 1920년 무렵이었다. 동시에 단재는 존화주의 적 사대의식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우리 민족(광의의 조선족)의 고대사를 단군과 고구려 중 심으로 놓았다. 이러한 단재의 민중사관이 절친했던 홍명희의 문학세계에 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은 당연 한 이치다. 벽초는 해방직후의 한 대담에서 <역사적 사실에서 테마를 잡아서 단편을 쓰되 시대 순서로 써 모으면 역사소설이라느니보다 소설 형식의 역사가 되려니, 일면으로는 민중 적 역사도 되려니 생각>했다고 토로하며35) 민중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 고 있었음을 밝혀 두었다. 그러니까 벽초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소설형식을 빌어서 민중 의 삶을 기록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단재의 '역사와 소설형식이 결합된 비역사, 비소설 36)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결과다. 홍명희의 민중사상은 단재의 민중사관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론 부친 홍범 식이 죽음으로 남긴 유언(일제에 야합하지 말라는 당부)과 스스로 역사사회주의 서적(書籍) 을 탐독하고 형성한 세계관이 있었겠지만 단재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그러한 민중사상에 의하여 「임꺽정」은 쓰여졌을 것다. 「임꺽정」을 집필하던 1933년 벽 초는 백정계급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울분을 이야기한 후, 원래 특수 민중이란 저희들끼리 단결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외다. 백정도 그러하거니와 체 장사라거나 독립협회 때 활약하던 보부상(褓負商)이라거나 모두 보면 저희들끼리 손을 맞잡 고 의식적으로 외계에 대하여 대항하여오는 것입니다. 이 필연적 심리를 잘 이용하여 백정 들의 단합을 꾀한 뒤 자기가 앞장서서 통쾌하게 의적(義賊)모양으로 활약한 것이 임꺽정이 었습니다. 그러이러한 인물은 현대에 재현시켜도 능히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으리까.37) 라고 밝혔다. 벽초가 의도했던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민중의 이야기를 조선의 형식으로 담 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임꺽정」은 「일목대왕의 철퇴(鐵槌)」와 같은 단재의 실패거인(失 敗巨人) 소설38)과 같은 정조(情調)를 지니고 있다. 「임꺽정」은 이른바 영웅소설로의 면모 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전우치전」과 같은 군담(軍談)을 민중영웅으로 변형시킨 작품인 것 이다. 민중영웅을 등장시킨 벽초의 의도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3.단재와 벽초 - 결론을 대신하여 논자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단재와 벽초가 국학의 민족주의적 맥을 잇는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단재와 벽초의 역사적 의의는 양반계층이면서 그들의 세계관이었던 주자학적 이데 올로기를 넘어섰다는 데 있다. 두 분은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복고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해방을 위한 진보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은 되짚어 강조되어 마땅하다. 둘째,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창한 민중의 직접혁명을 벽초는 「임꺽정」에서 실 현시키고 있었다. 민중의 직접혁명을 주장한 단재나 수많은 역사의 소재 중에서 천민 백정 (白丁)의 이야기를 쓴 벽초는 식민지적 현실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민중적 세계관 속에 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당시의 민중은 식민지 조선인 모두를 상징한다. 셋째, 단재와 벽초의 작품을 소설이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루카치(Lukac's)적 관점 에서가 아닌, 우리나라 전통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논의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조선 시대의 강담사(講談師) 노릇을 하고 있는 홍명희의 이야기 구연(口演) 방식 은 서구 소설의 서술방식과는 다르다. 그래서 논자는 ①이광수 - 염상섭 - 이기영 - 이상 - 김승옥으로 이어지는 흐름과는 다른, ②신채호 - 홍명희 - 황석영 - 이문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해 보았다. 잠정적으로 ①을 이광수적 축, ②를 신채호적 축으로 명명해 둔다. 물경스런 가설(假說)로 보일 수도 있는 두 흐름은 그러나, 크고 깊은 한국문학의 강 속에 녹 아 있는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져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넷째, '이식문화론과 전통단절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해묵은 과제의 실마리 를 단재류의 역사전기소설과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서구 소 설의 영향보다도 고전소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그 밖에 이야기의 구성 방식이나 작가 또는 서술자의 태도, 그리고 묘사의 방법 등에서도 고전소설의 유산(遺産)을 계승하고 있다. 참고문헌 1)강영주, 「일제말 홍명희의 은둔과 '조선문화' 탐구」, 『역사비평』 1995년 겨울호. 계간 31호. p.257. 2)「한국근대문학에 있어서 『임꺽정』의 위치」,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 자 료』, 사계절,1996. p.299. 3)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상사』, 한길사,1984. p.18. 4)단재 신채호, 「홍벽초씨에게」,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1982. p.358. 5)홍명희는 1988년 괴산에서 풍산 홍씨 문중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신채호는 1880년 외가인 회덕(懷德)에서 고령 신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6)홍명희, 「상해시대의 단재」, 『단재신채호전집』 하권, 형설출판사,1982. p.474. 7)홍명희, 「곡 단재(哭 丹齋)」, 『조선일보』 1936ㅇ년 2월 28일. 임형택 강영주편,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 사계절, 1996. P.51. 재인용. 8)홍명희, 「상해시대의 단재」, 『단재신채호전집」 하권, 형설출판사,1982. p.475. 9)강영주, 「『임꺽정』과 홍명희」,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 계간 30호. p.259. 10)『단재 신채호전집』 하권, 1982. p.500. 11)강영주, 「벽초 홍명희」 ②, 『역사비평』 1994년 봄호. 계간 24호. p.137. 12)채진홍, 「홍명희의 「임꺽정」 연구」, 새미,1996. p.123. 13)신채호 - 홍명희의 축은 황석영의 「장길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임꺽정」과 「장길 산」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안태영, 「역사소설 「林巨正」과 「장길산」 연구」, 충북대 석사논문,1991. 14)임화는 만화경적 이야기의 연쇄라는 점에서 「임꺽정」을 세태소설로 분류하였다. 이러 한 관점은 근대문학의 틀 속에서 「임꺽정」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임화, 「세태소설론」, 『문학의 논리』, 백양당,1939. p.356. 참조. 15)조동일,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1985. p.272. 16)Georg Lukac's, Die theorie des Romans, Luchterhand,1962. p.42. 17)홍명희, 「林巨正」, 1권, 사계절,1985. p.7. 18)홍명희, 「林巨正」, 1권, 사계절,1985. p.11. 19)판소리 사설 「변강쇠가」, 『신재효 판소리사설집』, 민중서관,1974. p.533. 20)강담사는 다음과 같은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구연화(口演化) 기록화(記錄化) 근원사실 ------------- 이야기 -------------- 한문단편 임형택, 『한국문학사의 시각』, 창작과 비평사,1984. p.435. 21)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예하,1993. p.208. 22)임형택, 「18·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 『고전문학을 찾아서』, 문학과지성 사,1982. p.311. 강담사는 담화조로 이야기하는 <story teller>이며 강독사(講讀師)는 소설책을 낭독하는 형 태이다. 「임꺽정」의 인물서술방식은 강담사가 구연하던 한문단편과 매우 유사하다. 위의 글 참조. 23)임형택, 「한국근대문학에 있어서 『임꺽정』의 위치」,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 자료』, 사계절,1996. p.324. 24)성현자,「단재 신채호의 역사전기소설연구」, 『단재신채호연구논문집』, 충북대학교 인 문과학연구소,1994. p.186. 25)조동일,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1985. p.288. 26)전(傳) 양식은 설화나 소설과는 달리 서술자의 의식이 개입하게 된다. 이때 본래 사실 에 충실한 전(傳)과 서술자의 의식적인 서술방식을 분리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김균태, 「'전(傳)'의 장르적 고찰」, 『雨田辛鎬烈先生古稀紀念論叢』, 창작과비평사,1983. p.226. 참조. 27)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단재신채호전집』 하권, 형설출판사,1982. p.34. 28)이광수, 「인상깊던 편지」, 『이광수전집』, 8권. 민중서관,1974. p.426. 29)이러한 구도는 가설(假說)일 뿐이며, 소설사의 흐름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재의 역사전기소설과 벽초의 「임꺽정」이 민족의 문학유산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 해서 그려본 것일 뿐이다. 30)홍명희, 「『林巨正傳』을 쓰면서」, 『삼천리』 1933년 9월호, 임형택 강영주편, 『벽초 홍명 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 사계절, 1996. P.39. 재인용. 여기서 홍명희는 「임꺽정」이라고 하지 않고 「임꺽정전」이라고 함으로써 '전(傳)' 양 식을 차용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심스럽지만 단재의 역사전기소설이 근대 소설화 되어 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싶다. 전과 소설은 근대문학에 이르기까지 공존하다가 근대문학으 로 이행 발전되어 나갔다. 그 발전과정에 관해서는 다음 책 참조. 박희병, 『韓國古典人物傳硏究』, 한길사,1992. p.168. 31)E.M.Forster, Aspects of the Novel, HBJ Book, New York,1955. p.26. 포스터와 같은 고전적인 소설이론 역시, 소설의 이야기적 성격을 주목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방식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이야기와는 다른 보여주기(Showing)의 특징을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야기는 입으로 말하는(구연) 것이지, 보여주는 형식은 아니다. 32)임형택 교수는 한문단편의 특질을 다음 네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임꺽정」은 바로 이러 한 요소들을 거의 갖추고 있다. 첫째, 비록 한문 표현이지만 우리 민족 특유의 속담 생활어휘를 적절히 구사해서 우리의 언어 정감에 밀착되어 있다. 둘째, 당대의 현실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반영하였으며 신분의 분화, 민중의 저항 등 역사의 발전방향을 부각시켰다. 세째, 역사의 전진방향에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새로운 인간형상을 창출하였다. 그 주인공은 주로 민중 속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네째, 전개방식은 서술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임형택, 『한국문학사의 시각』, 창작과 비평사,1984. p.437. 33)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1977. p.16. 34)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연구』, 문학과지성사,1990. p.189. 35)「벽초 홍명희 선생을 둘러싼 문학담의」, 임형택 강영주편,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 사계절, 1996. P.191. 재인용. 36)김병민, 『신채호문학연구』, 중국 료녕성민족출판사,1988. p.99. 37)홍명희, 「『林巨正傳』에 대하여」, 『삼천리』 창간호,1929년 6월호. 임형택 강영주편,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 사계절,1996. p.34. 재인용. 38)임중빈, 「단재문학의 영웅상과 민중상」,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1980. p.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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