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한산의 우이계곡은 우리풍산홍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 이기에
관련자료를 알려 드리오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사정공계추만공파종회 회장 홍기천 드림(이계공의 8세손)
서울 강뷱구청장은 2018,11,29일 우이구곡의 생태계복원사업 착공식을 거행 하였습니다
신문기사 내용
우이구곡(牛耳九曲)은 우이동 계곡 내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한 명소로
조선 영‧정조 때의 인물인 홍양호가 현 도선사 계곡에 우거하면서 좋은 경치를 주제로 삼아
‘우이동 구곡’을 명명하고 그의 문집 이계집(耳溪集) 속에서 우이동장기(牛耳洞庄記)라 하여 우이구곡을 설명하고 있다.
강북구(구청장 박겸수)는 2018년11월 29일 오전 10시 도선사 인근 우이동 산 69번지 콘크리트 보 앞에서
조선시대 서울 유일의 구곡인 우이구곡(牛耳九曲) 원형 복원사업 착공식을 개최했다.
우이구곡은 1762년경 풍산홍씨 가문의 홍양호(1724~1802) 선생이 이 일대를 본격적으로 가꾸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정조대 대제학을 역임한 홍양호 선생은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의 상량문을 쓴 인물로 우이동 계곡을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우이구곡기(牛耳九曲記)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도선사에서 시작되는 약 2.3㎞ 구간인 우이구곡에는
이번 사업 대상지인 만경폭부터 적취병, 찬운봉, 진의강, 세묵지, 월영담, 탁영담, 명옥탄, 재간정까지 9개의 이름난 곳이 자리하고 있다.
이 우이구곡에 대해서 권오도 전 강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이 꾸준히 구청에 알리고 복원할 것을 주장해 사업의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강북구는 이러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장소를 원형복원 사업을 통해 관광 명소로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개방할 방침이다.
도선사, 봉황각 등 주변의 탐방장소는 물론 향후 마련될 가족캠핑장과 연계해 지역의 주요 관광지로 단장한해서 방문객 증대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
이날 착공식이 열린 장소는
우이구곡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제1곡 만경폭 주변으로
박원순 서울시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이백균 강북구의회 의장, 천준호 지역위원장(더불어민주당 강북갑),
안광석 시의원, 유인애 부의장, 최치효, 허광행, 서승목, 구본승, 김영준, 이정식, 이용균, 김명희, 조윤섭, 최재성, 김미임, 최미경 구의원 등 내빈 100여명이 참석을 했다.
한명수 안전치수과장은 우이구곡 복원사업에 대한 현황보고에서 국‧시비 10억을 받아 훼손된 자연복원을 하는 착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국립공원 내 이기 때문에 자연훼손을 최소한으로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기념사에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의 콘텐츠가 선비문화이다.
선비들이 휴양을 하고 글을 읽고 나라의 경영을 하면서 토론하고 논쟁하는 부분들이 발전하다 구곡에서 더욱 심화됐다고 생각한다.
성리학이 심화되면서 선비문화가 되고 그것이 발전해서 의병활동을 연결이 되었다.
그런 장소 중 서울의 유일한 곳이 우이구곡이다.
구에서 용역을 두 번 줘서 이 위치와 역사에 대해서 정확히 서울학연구소에서 찾아냈지만
원형이 훼손된 것이 몇 군데 있어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의논해서 복원시키기로 했다.
대한민국 구민이 구곡문화를 제대로 접해보면 대단한 선비문화가 있었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면서
박원순 시장에게 복원이 끝나면 우이동에서 구곡문화제를 개최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하 생략
**본 공사 준비과정에서 강북구청 관계자와 관계 연구기관 연구원등과 추만공종회 및 이계공 후손등과 사전 협의가 있었음을 참고로 알려 드립니다
개인적 판단으로 학계에서 우리가문에 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하고있는 학자의 한분 이라고 판단되는
이군선 교수님의 우이구곡기에 대한 논문 한편을 올려 드리오니 읽어보시면 이해가 잘 되실것이라 생각 됩니다
耳溪家와 牛耳洞
李君善(원광대학교 교수)
우 이 구 곡 기
국문초록
우이동은 이계 홍양호에 의해 풍산 홍씨 가문에 귀속되었다.
이계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조상의 무덤이 있는 우이동을 자기 가문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경주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유하게 된 우이동에 대한 이계의 관심과 애정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조상의 무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풍산 홍씨의 소유가 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유권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이동에 별장을 경영하면서 우이동의 승경을 발굴하고 이에 대한 기록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관암은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계를 의지해 성장하였다.
관암은 우이동에서 이계를 모시고 생활하던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한 바 있다.
그리고 관암은 평생 이계의 기업을 잇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가운데의 하나가 우이동에 관련한 저술이다.
관암의 문집 곳곳에 남겨진 이계에 대한 추억을 보면, 관암은 언제나 이계의 기업을 제대로 잇고 있지 못하였음을 탄식하고 있다.
약 200 여 년전에 이계와 관암이 남긴 이러한 기록들이 오늘날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무엇일까?
본론에서도 보았듯이 지금의 우리가 우이동을 대상으로 한 관암의 시를 감상하면서 관암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관암 : 이계 홍양호의손자 이조판서 시호 문정
* 경북대 퇴계연구소skklgs@hanmail.net/ 018-275-5069(110-745) 종로구 명륜동 3가 53번지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2 韓國漢文學硏究33輯
관암 시대의 우이동과 현재의 우이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상의 숨결이 묻어 있는 자신의 공간을 아름답게 인식하고 가꾸어 나갔던 관암의 자세와 현대의 난개발과는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 땅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잠시 빌려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후손들에게 보다 아름다운 환경을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200년 전 이계와 관암의 우이동 관련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제어 : 우이동, 겸산루(兼山樓), 우이동 별장, 우이구곡(牛耳九曲), 소귀당(小歸堂), 우이동지(牛耳洞志)
1. 서론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산다.
그런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이 무참하게 훼손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어 후대에 전해야 할 사명이 분명히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대로 이 땅을 전해 받고 전해주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부터 대략 200여 년 전 서울 인근 북한산 아래에 있는 우이동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우이동의 승경은 조선 전기부터 사인들에 의해 이따금 노래되기도 하였는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耳溪洪良浩(1724~1802)에 와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뒤에서 할 얘기를 미리 한다면
이계는 우이동에 조상의 무덤이 있는 것을 계기로 우이동에 별장을 짓고 우이동을 桑梓之鄕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계의 손자 冠巖洪敬謨(1774~1851)는 우이동에 대하여 보다 체계적인 기록을 남겼으니, 牛耳洞志 가 그것이다.耳溪家와 牛耳洞3
본고에서는 우이동에 관련한 이계 가문의 기록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한다.
이를 통해 우이동이 어떠한 경위로 이계 가문에 속하게 되었는지,그리고 이계와 관암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지,
아울러 그 기록이 갖는 현대적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작업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인식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이계가의 남다른 노력을 살펴보는 일이자,
무분별한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 외곽 순환도로의 건설문제로 정부와 환경보호 단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꼭 짚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2. 우이동 별장의 경영우이동은 본래 덕수 이씨 東岳李安訥(1571~1637) 가문의 소유였다.
1) 그런데 덕수 이씨의 소유였던 우이동이 어떠한 경위를 통하여 이계 가문의 소유가 되었을까?
3 이계의 가문이 우이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洪萬恢
1) 본고는 우이동에 관한 보다 넓은 자료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계와 그 손자인 관암의 기록에 한정하여 우이동을 고찰하였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상당부분 있을 것이다.
한국문집총간 78, 동악선생문집 을 보면 권8의 「疊用前韻別印悟沙門還楓岳舊刹」에 “松溪在楊州牛耳洞乃余家別業也”라 하였고
권18의 「題南宮子久草堂」에 “余家田莊在於三角山下牛耳洞故云”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미루어보면 우이동이 위로는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동악 대부터는 확실히 덕수이씨 가문의 소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우이동의 행정구역도 동악 시대에는 양주였음을 알 수 있다.
동악가를 살펴보면 李安訥-李禾甲-李光夏-李土集-李周鎭-李溵으로 이어지는데 동악의 우이동 별장 역시 계속 이와 같이 전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와 관련한 논문으로 이종묵의 「홍양호와 삼각산 우이동」( 문헌과해석 24, 문헌4 韓國漢文學硏究33輯
(1643~1709) 때부터이다. 홍만회는 아버지인 洪柱元(1606~1672)이 미리 보아 두었던 麻田의 묘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홍만회는 아버지가 물려준 이 마전의 묘자리를 자신의 묘자리로 삼아 두었는데,
정작 그가 죽자 근기 지방에 묘자리를 쓰자는 의견이 일어 다시 묘자리를 정하는 일이 생겼다.
새로운 묘자리를 물색하던 중, 맏사위인 醉村李土集(1664~1733)의 의견에 따라 우이동 天冠峯동쪽 圭巖의 아래에 묘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묘자리를 훼손하자, 다시 동쪽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그후 1731년에 홍만회의 부인이 죽자 합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합장하지 못하고 이전에 훼손당했던 홍만회의 묘자리 아래에 부인의 무덤을 따로 쓰게 되었다.
3) 결국 홍만회 부부는 둘 다 남의 선영에 묘를 쓰게 된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이계는 「이계묘산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과해석사, 2003)이 있다.
이종묵은 우이구곡의 위치를 현장답사를 통화여 확인한 다음, 논문에서 사의당 이계의 우이동 별장 우이동구곡 등을 다루었는데 다음과 같은오류가 있다.
첫째, 우이동 별장이 홍만회가 처가인 덕수이씨를 통해 구입했다고 하였는데 덕수이씨 이집은 홍만회의 맏사위이다.
둘째, 홍양호가 우이동에 묻혔다고 하였는데 실제 홍양호는 천안의 일봉산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무덤이 남아있다.
셋째,「이계암서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 이름의 책자가 따로 전하지는 않지만 관암유사에 합철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계암서지」는 관암의 초년작을 모은 것으로 관암 산방신편운석외사 전편 2의 편명이다.
이후 중국에 사신 갈 때에 자신의 시문을 정리하여 관암유사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도 역시 우이동 시절에 지은 시문을 「이계암서지」라는 이름으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경모는 이계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실제 관암은 이계의 그늘에서 항상 이계를 조술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다시피 한 인물이다.
우이동의 기록 역시 이계의 틀 위에서 자신의 의견을 첨가한 것이다.
3) 耳溪集 13, 「牛耳墓山記」. 昔我曾王考判決事府君以肅廟庚寅下世壽藏預卜於麻田地至是多異議將改卜近畿醉村李相公卽府君長婿也爲言其先墓隣麓多養山置標之地盍試求諸於是遣地師占得於牛耳洞天冠峯之東圭巖之下坐庚之原遂奉襄焉未幾有毁之者移窆於東麓矣英宗辛亥曾王妣下世將合封也遇水患復還奉於舊壙之下見者咸稱名穴信乎物自有主也耳溪家와 牛耳洞5
취촌공이 살아 있을 때 문서를 만들어 할양받지 못했다.
때문에 묘역 내 땅 한 조각 나무 하나도 모두 이씨에게 속해 있어 묘지기조차 수족을 둘 곳도 없었으니,
사세가 불편할 뿐 아니라 또한 후손들이 멀어지게 되면 혹 쟁송의 발단이라도 있게 될까 걱정하였다.
4) 선조의 부마였던 홍주원의 막내아들 홍만회에서 洪重聖(1668~1735),洪鎭輔(1698~1736)로 이어 내려오던 이계의 가문은
홍중성과 홍진보가해를 이어 서거하자 급격하게 기울게 된다. 결국 貞明公主에게 받아 물려 내려오던 薰陶坊泥峴의 四宜堂마저 남의 손에 넘어간다.
이 상황에서 묘자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
러다가 이계가 1752년 29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뒤 영소하러 갔을 때, 마침 취촌의 손자인 李溵(1722~1781)도 묘사에 와 있었다.
이계는 산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문서를 만들어 줄 것을 그에게 부탁하였다.
5) 이공이 말하였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이미 장지를 드렸고 나의 선인께서도 판결공(홍만회)를 외조처럼 여기셔서 우리 집안은 외손으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문서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백 대가 지나도 보존할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굳이 청하자 이공이 허락하였다.
6) 이은이 “선인(李周鎭: 1691~1749)께서 判決公을 외조처럼 여겼다”고한 표현은 실제로는 외할아버지가 아닌데, 정리 상 외할아버지로 여겼다는 말이다.
4) 같은 글. 當醉村公時未及成券劃送故局內寸土一木皆屬於李氏而守墓奴無所措手不惟事勢不便抑恐後屬漸遠或有爭端5) 같은 글. 余於壬申登科榮掃仍往拜從祖姑貞敬夫人墓于時醉村冢孫李相公溵來住墓下余爲言山事請歸直而立券6) 같은 글. 李公曰吾祖旣獻葬地吾先人視判決公如外祖吾家自處以外裔何事乎券余曰百世之遠寧可保耶固請之李公諾6 韓國漢文學硏究33輯
이는 이집과 홍만회의 관계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집은 처음에 홍만회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이 상처를 한 뒤, 다시 金壽賓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주진을 낳았다.
따라서 이주진은 홍만회에게 외손자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주진은 이집의 전처에 대해서도 어머니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친척지간에 굳이 문서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남의 산에 조상의 무덤을 쓴 이계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아 굳이 문서를 만들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게 된다.
하지만 문서를 만들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나갔던 이계는 1762년 경주부윤 등 지방관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다시 문서를 작성하자 청하고 비석을 세워 이를 기록하게 하였다.
이때 이 비문은 이은이 쓰고 글씨는 이계가 썼다.
이계는 저동에 있는 밤나무 밭을 그 대가로 주었으니, 땅과 땅을 맞바꾼 것이었다.
7) 우여곡절 끝에 조상의 무덤이 있는 우이동을 자신의 소유로 만든 이계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아아. 경인년(1710)년에서 정해년(1767)까지 햇수로는 58년 삼대를 지나 만세의 유택이 비로소 남의 땅을 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로부터 비로소 나무로 심고 과수를 심을 수 있게 되었으며 묘지지 역시 산과 묵정밭을 가꾸고 과원과 채소를 길러 제사에 올리며 살 수 있었다.
7) 같은 글. 猶荏苒歲月至壬午余自月城歸復申前言李公書報曰一山全局當盡歸之而但有二殤葬在右岡外墓舍後雖是凡棺堲周乃骨肉所託不忍作他人有請環墓兆一岡而爲界余復曰先祖衣履之葬今歸諸我敢不拜而敬受然一山之內分割其半將無以養松柏聚村落焉子所難之者特以殤葬而兩家義同至親守護之道寧殊彼我請立石以表之至若局內山田栗園吾不可空受子不欲貨之則以土易土名正理順吾家栗園在豬洞去此數里之近請以是易焉李公從之乃作分山說見贈以豬洞園林換一山內外於是伐小石分立於兩殤葬前刻曰此德水李氏殤葬也局內本李氏地今屬洪氏惟我子孫永世守護毋替兩家之篤好下書丁亥三月李溵識洪某書耳溪家와 牛耳洞7
8) 삼대에 걸친 세월 속에 마침내 우이동을 차지한 이계는 언제부터 이곳에 별장을 경영하게 되었을까?
별장은 묘막에서 시작되었다.
본래 이곳은 묘지기가 상주하면서 제기를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이계가 우이동에 나가있는 동안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관암이 기록한 「우이동지」의 「당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풍산홍씨의 우이동 별장은 風木窩, 小歸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風木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풍목와는 바로 묘막인데 모두 8영으로 대청이 두 칸, 꺾여서 동쪽으로 온돌이 두 칸, 양쪽으로 주방이 한 칸 반, 서쪽으로 온돌이 한 칸이다.
이것은 경인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운와공(홍중성)이 이름한 것이다.
정종 무신년(1788)에 초가집 4영을 병사의 서쪽에 만들고 마구간, 창고, 대문과 행랑을 만들어 내외를 구분하였다.
9) 풍목와는 바로 운와 홍중성(1668~1735)이 홍만회를 장사지내고 시묘 살이하던 곳인데, 이후 이계가 우이동에 은거하면서 증축한 곳이다.
다음은 小歸堂에 대한 기록이다.
소귀당은 병사(풍목와)의 남쪽에 있는데
정종 정유년(1777)에 문헌공(이계)이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거할 적에 병사(풍목와)의 전면을 가리고새로 만든 것으로
동쪽에 온돌이 두 칸, 가운데에 대청이 한 칸, 퇴헌이 두칸, 서쪽으로 온돌이 한 칸인데 편액은 송하 조윤형이 썼다
8) 같은 글. 嗚呼自庚寅至丁亥爲五十八年歷三世而萬歲幽宅始免於客土豈非大幸歟自是始得以種樹栽果墓奴亦治山菑藝園蔬賴以奠居焉9) 外史前編 4, 「牛耳洞志」, 「風木窩」. 風木窩卽丙舍舍凡八楹爲軒者二間折而東爲溫突二間翼而爲廚一間半西爲溫突一間是庚寅後所建而芸窩公命名者也正宗戊申構茅屋四楹於舍之西爲廐庫門廊以障內外 8 韓國漢文學硏究33輯
10) 정조 초년인 1777년(정조 1) 정조의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비록 친족관계이었기는 하지만, 홍국영과 당색을 달리 했던 이계는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고 신변마저 위협받게 된다.
11)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계는 관직을 사퇴한 뒤 우이동에 와 거처하였다. 이때 지은 것이 소귀당이다.
우이동의 공간에는 별장을 중심으로 兼山樓와 水哉亭이 있었으며, 牛耳九曲이 자리 잡았다. 이는 모두 이계 대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뒷날 관암은 이곳에서 이계를 모시고 글과 글씨를 배우며 유람을 나가기도 한다.
관암의 저작인 외사전편 2에 실려 있는 「이계암서지」와 외사전편4에 실려 있는 記들이 바로 이 시절의 저술이다.
관암은 이계를 모시고이곳에서 생활했던 시절을 평생 동안 가장 즐거웠던 때로 回憶한 바 있다.
묘막에서 출발한 우이동의 별장은 관암 대에 이르러 유, 불, 선에 관계된 서적을 모두 구비해 놓고 연찬하는 장소로,
친구들과 어울려 우의를 다지는 교류의 장으로 발전하여 관암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되었다.
10) 외사전편 8, 「우이동지」, 「소귀당」. 小歸堂在丙舍之南正宗丁酉文獻公謝官郊居遮丙舍前面而新構東爲溫突二間中爲軒一間退軒二間西爲溫突一間扁揭松下曺公允亨書11) 진재교, 이계홍양호 문학 연구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9, 38쪽.12) 외사전편 4, 「이계암서기」. 또한 도애 홍석모의 글에도 이계를 모시고 우이동에서 꽃구경한 시가 실려 있으며 이계가 서거한 뒤에도 우이동은 꽃놀이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耳溪家와 牛耳洞9
3. 우이동의 문학적 형상화
1) 牛耳九曲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계는 간난신고 끝에 우이동을 소유한 다음, 墓舍를 증축하여 별장을 꾸미고 정자를 짓는 등
보다 완벽하게 우이동을 풍산 홍씨의 소유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여가에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때 시종했던 사람은 관암과 그의 종제인 陶厓洪錫謨이다.
이계는 손자들을 데리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주변 승경을 노래하는 한편, 자신의 巖棲地(은거하는 곳)를 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가꾸기 위하여 우이동구곡을 선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우이동구곡기」를 지었다.
도애 홍석모 : 남원부사 동국세시기 저자
13) 우이동구곡은 제1곡인 萬景瀑에서부터 2곡 積翠屛, 3곡 攢雲峰, 4곡 振衣岡, 5곡 玉鏡臺, 6곡 月影潭, 7곡 濯纓巖, 8곡 鳴玉灘, 그리고마지막인 제9곡 在澗亭이다.
이계가 선정한 우이동구곡에 대하여
관암은 「구곡가」와 「이계구곡기」를 짓는 한편, 따로 「우이동지」에 「이계구곡기」를 하나하나 풀어 기록하였다.
서로간의 차이는 크게 나지 않지만 「우이동지」의 기록이 보다 상세하다.
현재 남아있는 우이동의 모습을 통하여 이계가 선정한 우이구곡의 전반적인 면모를 반추해 본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본고에서는 주로 이계와 관암의 기록에 의거하여 「우이구곡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이구곡가」는 모두 10수로 되어 있다.
14) 첫째 수는총론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우이동 전반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화산의 세 봉우리 기이함과 신령함을 품고 있는데
13) 이계는 우이동구곡을 선정하고 「우이동구곡기」를 지었을 뿐 우이동 구곡에 대한 시는 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4) 「牛耳九曲歌」는 외사전편 2에 실려 있다.10 韓國漢文學硏究33輯
아래에 맑은 시내 구비구비 흘러간다 그 중의 기이한 절경을 알아보면 무이산․향사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
華山三朶孕奇靈下有淸溪曲曲成欲識個中奇絶處武夷香社可幷名華山은 삼각산의 옛 이름이다.
삼각산 세 봉우리 아래에 형성된 우이동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다음, 우이동의 승경을 주자의 무이산과 백낙천의 향사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분명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관암은 「우이동기」에서 우이동은 삼각산 동북쪽 아래에 있으며 골짜기가 깊어 지나가는 사람은 대부분 골짜기가 있는 줄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이동구곡은 주자의 무이구곡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우이동에 대한 자부와 사랑을 넌지시 담은 것이다.
일곡은 나는 듯한 흐름 구천에서 떨어져 높이 펼쳐 에워 싸 반공에 매달렸네 폭포 위의 거석은 평평하기 책상 같고 물은 문을 다투어 온갖 내에 흩어지네
.一曲飛流落九天軒張圍抱半空懸當喉巨石平如案衆水爭門散百川
15) 이계는 우이동 골짜기의 근원을 찾아 아름다움을 취하고 구비를 따라 차례대로 구곡을 정하였는데
만경폭이 우이동구곡의 제1곡이다.
만경폭은 미륵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데, 바로 소귀당의 바깥 골짜기이다.
본래 만경폭은 미륵폭이라는 이름으로써 암벽에 그 이름이 크게 새겨 있었다.
이계는 불교적인 색채를 지닌 미륵불의 이름을 만경폭으로 바꾸었다. 만경폭 이란 명칭은 폭포가 만경대의 아래에서 나왔기 때문에 명명한 것이다.
15) 외사전편 2, 「구곡가」, 「萬景瀑」.耳溪家와 牛耳洞11
16) 이곡은
산이 낮아져 골짜기 점점 굽이쳐 굵은 물줄기 세차게 쏟아져 소용돌이 이루었네 푸른 이내 산을 덮으니 걸어놓은 그림인가 비단 구름 병풍이 물에 거꾸로 열려있네
.17)二曲山低洞漸回束流奔瀉便瀠洄山霏嵐翠如懸畵雲錦屛風倒水開적취병은 제2곡으로,
만경폭에서 남쪽으로 백여 보를 내려오면 산세가 점점 낮아져 골짜기가 다시 합쳐지는 곳이다.
「이계구곡기」에 따르면 소나무 등걸이 무성하고, 연이은 산들이 틈틈이 높이를 낮춘 도처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골짜기는 깎아지른 벼랑이 에워싸고 있는데 들쭉날쭉 마주하여 우뚝 솟아, 나는 듯 춤추는 듯 비단 병풍을 두른 모양이다.
계곡물이 두 병풍 아래로 쏟아져 어지러이 찧고 부딪히며 난석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데, 형세가 마치 바퀴가 구르는 듯하며 소리는 석경을 치는 듯하다.
16) 외사전편 8, 「우이동지」, 「만경폭」: “萬景瀑在彌勒洞最深處卽小歸堂之外洞也瀑亦以彌勒名之大鐫于壁我文獻公窮源而取其勝隨曲而弟其次定爲九曲此是第一曲而以瀑出於萬景臺之下故稱之以萬景瀑”17) 외사전편 2, 「구곡가」, 「積翠屛」.12 韓國漢文學硏究33輯
물의 동서에는 회나무․삼나무․석남나무․소나무․단풍나무 등이 많이 있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푸른 산과 산내가 병풍처럼 둘러친 벼랑에 알맞게 배치되어 흐릿흐릿하여 그윽한 맛을 더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적취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벽면을 따라 비껴 다니며 길을 취하여 동쪽으로 버티며 더위잡고 오르내리는데,
골짜기가 깊고 깊어 인간 세상과 떨어진 듯하여 꼴 베는 사람과 나물 캐는 사람이 드물게 자취를 남긴다고 하였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관암의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적취병의 아름다움은 그림과 같다.
육곡은 둥글고 깊은 작은 연못너럭바위는 쪽보다 푸르네 중추에 달빛 구경 딱 좋으니 수중의 돌 위에 달 그림자 셋을 이루네.
18)六曲圓泓半畝涵盤陀大石碧於藍正好仲秋看月色水中石上影成三
이계구곡은 굽이굽이 놀기 좋지만 만경폭에서 옥경대까지는 깊은 산중으로 험하고 궁벽하며 탁영암에서 재간정까지는 골짜기의 바깥에 있어 쉽게 드러난다.
그런데 월염담만은 중간에 있어 아름답고 기이하며 넓고 평탄하여 구곡 중에서 최고로 치는 곳이다.
옛 사람 중 이 계곡에서 노닌 사람은 이 연못을 놓아두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관암은 하루에두 번 이곳을 유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피곤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육곡시 가운데의 관암은 달빛 아래 호젓하게 앉아 독작을 하는 모습이다.
18) 외사전편 2, 「구곡가」, 「月影潭」.耳溪家와 牛耳洞13
그 정취가 李白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月下獨酌」의 한 대목을 마지막 구절에 슬쩍 차용했는지도 모른다.
월영담은 우이동구곡의 제 6곡으로 소귀당 바깥 골짜기에 있다.
구곡은
곡이 다하는 재간정 맑은 모래 흰 물 붉은 기둥 에워 쌌구나 상공의 아취 지금은 어이 볼까
산새 우는 꽃밭에서 술잔을 기울이노라 九曲將窮在澗亭沙淸水白護丹楹相公雅趣今何見山鳥啼花落酒觥
관암의 기록을 빌리면, 팔곡인 명옥탄에서 몇 발걸음을 가면 층암이 이어지는데, 이곳에 작은 여울이 있고 북쪽으로 수재정이 있다.
서쪽에서 작은 개울이 천관봉으로부터 겸산루를 돌아 수재정 아래로 흘러드는데 여기가 燕尾川이다.
연미천은 수재정 아래에서 명옥탄의 물과 합쳐진다.
이곳에서 수십 보를 내려가면 골짜기가 넓어지는데, 맑은 물에 흰모래가 펼쳐진 곳에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삼대 상공 서공19)의 옛 별장이다.
여기가 바로 재간정으로 우이동구곡의 마지막이다.
물이 이곳에서 꺾이어 동쪽으로 흘러 벌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는 재간정을 중심으로 펼쳐진 승경을 노래하였다.
우이동 계곡의 끝자락에 위치한 재간정을 둘러싸고 있는 대표적인 사물은 깨끗한 모래와 하얗게 부서지는 여울물이다.
탈속의 공간인 양 해맑은 재간정에서 피는 꽃을 완상하며 산새소리에 들으며 회고 에 젓는 관암의 모습이 구곡가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19) 서명균(1680~1745)을 가리킴. 아버지 徐宗泰와 아들 徐志修까지 3대가 모두 정승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삼대 상공이라고 하였음. 在澗은 그의 호임.14 韓國漢文學硏究33輯
성리학이 유입된 이래로 계곡의 승경은 대체로 구곡으로 선정되고, 구곡가의 형식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계가 구곡의 아홉이라는 숫자를 염두에 두고서 나름대로 주역을 빌어 그 의미를 풀고 있지만,
그의 우이동구곡 선정 역시 무이구곡에서 연원하고 있다.
다음은 이계가 쓴 「우이동구곡기」의 한 대목이다.
대개 만경폭에서 재간정까지는 5리가 좀 넘는 것에 불과하다.
물의 아래는 대체로 모두 돌로 기암과 층폭이 간간이 섞여 나오는데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다.
그 큰 것만 든 것이 아홉이니 얼마나 풍부한가 ?
대저 구라는 수자는 양의 성대함이고 수의 완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괘의 책에 구를 썼고 홍범에 구주가 있으며 우공에 구주가 있는 것이다.
골짜기에 구곡이 있게 된 것도 또한 자연의 수이다.
주자가 무이산의 그윽함을 드러내 밝힌 뒤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름난 곳을 정함에 대체로 구로 하였는데
오직 영남의 도산과 해주의 석담만이 가장 드러났으니 어찌 지세의 아름다움에만 달려있는 것이겠는가 ?
아마도 사람으로부터 드러나는 것일 것이다.
지금 우이 구곡은 만경폭의 웅장하고 기이함과 월영담의 청절함은 무이산과는 어떤지 알지 못하겠지만 도산과 석담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드러나고 드러나지 못함은 또한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인저.
20) 이계집 권13, 「우이동구곡기」: “盖自萬景至在澗不過五里强而水底大抵皆石奇巖層瀑間步錯出指不勝摟而擧其大者爲九何其富也夫九者陽之盛數之極故乾之策用九而範有九疇貢有九州洞之有九曲亦自然之數也自夫朱夫子發武夷之奧東人之占名區者率多以九數焉惟嶺之陶山海之石潭尤著焉豈有地之勝歟殆由人而顯也今牛耳之曲如萬景之雄奇月影之淸絶未知孰與武夷而卽陶山石潭之所未有也然其顯不顯亦待乎人焉爾”耳溪家와 牛耳洞15
20) 이계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만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훌륭한 사람이 그 가치를 알아주어야 그 자연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이다. 그러면서 주자의 무이산은 실제 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도산과 석담은 우리나라에 있는 것으로 자연 경관에 있어서만큼은 우이구곡이 이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다분히 주체적인 발상이라고도 확대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우이동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여겼기에, 이계는 우이동을 제대로 빛낼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에 대한 겸사인 동시에 우이동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을 바라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계가 우이동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노력한 이유는 간난신고 끝에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풍산 홍씨의 소유가 된 우이동이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 될 곳을 이렇게 아름답게 인식하고 이를드러내고자 했던 이계의 노력이었다.
이계의 뒤를 이은 관암은 우이동의 구곡을 더욱 부연하고 우이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으며,
우이동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우이동지」를 편찬하게 되었다.
관암은 이계에게서 한 걸음 나아가 우이동구곡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다음은 「이계구곡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대개 만폭동에서 재간정에 이르기까지 겨우 5리이지만 기암과 층폭이 사이에 남모르게 섞여 나오는데
그 큰 것만 들어 합하여 이름 붙이길 구곡이라 하였다.
초곡은 雄奇하여 그 기개가 늠늠하고
이곡은 孤高한데 그 형상이 궤이하다.
삼곡은 幽森한데 그 색이 엄하며
사곡은 窈眇한데 그 취미가 영원하다.
오곡은 靜麗하여 그 신이 청수하며
육곡은 舒朗하여 그 모습은 화락하다.
칠곡은 澄潔하여 그 빛이 밝으며
팔곡은 激射하여 그 소리가 맹렬하며
구곡은 澹靜하여 그 형세가 유원하다.
16 韓國漢文學硏究33輯
구곡의 승경을 모아 아래위로 거슬러 오르면
영남의 도산과 해주의 석담과 우열을 다툴만하며 경성 주위 백리 안에 폭포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계구곡과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이제야 알겠구나. 하늘이 신령스런 구역을 베풀어 나에게 먹이는 것이 사치하다는 것을.
21) 관암의 「우이동지」에 나와 있는 기록은 이계의 「우이동구곡기」보다 훨씬 상세하다.
관암은 우이동구곡에
각각 雄奇․孤高․幽森․窈眇․靜麗․舒朗․澄潔․激射․澹靜등의 미적인 품평을 가하여, 정적인 대상이 아닌 활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관암이 조부인 이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관암 자신도 이계의 사업을 잇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2) 관암은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우이동을 가장 잘 드러낸 인물로 「우이동구곡기」와 아울러 「이계구곡기」및 이에 관련한 다수의 기문을 남겼다.
2) 兼山樓겸산루는 높은 천관봉을 이고 수려한 수락산을 마주한 누각으로, 북쪽에는 만장봉, 서쪽에는 삼각산이 둘러싸고 있다.
21) 외사전편 4, 「이계구곡기」: “盖自萬景之洞至于在澗厪爲五里而奇巖層瀑間步錯出擧其大者合而名之爲九曲初曲雄奇其氣也凜二曲孤高其形也詭三曲幽森其色也厲四曲窈眇其趣也永五曲靜麗其神也粹六曲舒朗其容也和七曲澄潔其光也瑩八曲激射其聲也猛九曲澹靜其勢也遠集九曲之勝而下上溯洄則可甲乙於嶺之陶山海之石潭而環京城百里內瀑以名者無敢與耳溪九曲齒是知天設靈區以餉我者奢矣”22) 이군선, 「관암 홍경모의 시문과 그 성격」,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耳溪家와 牛耳洞17
이계는 소귀당 옆에다가 한칸 넓이에 몇 척 높이로 겸산루를 짓고 직접 편액을 써서 달았으며 「겸산루기」도 남겨놓았다.
23) 관암은 이계에 비해 훨씬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며 겸산루의 승경을 노래하였다.
관암이 겸산루에서 읊은 시는 「兼山樓謾題」와 「兼山樓雜詠」,
24) 그리고 「兼山樓八詠」이 있다.
「겸산루만제」는 관암이 이계를 모시고 우이동을 유람할 적에 지은 시인데, 모두 30수의 연작시이다.
우이동에 한가로이 살며 무엇을 하나 ?
산촌을 좋아하니 일마다 맞는다네
三畝의 택지에 기장 심고 닭 기르며몇 칸 울타리에 꽃 심고 대나무 모종하지
백 년 동안 잠들고 쉴 곳 오직 이 선궁이니
九曲의 노랫소리는 또한 武夷九曲歌라오띠 집에서 기거하며 스스로 즐기며
北窓엔 때로 庖犧를 꿈꾼다네
25)閒居牛耳問何爲獨愛山邨事事宜種黍養雞三畝宅栽花蒔竹數間籬百年睡息惟西華九曲歌聲又武夷
23) 이계집 권13, 「겸산루기」.24) 「겸산루잡영」의 小題는 다음과 같다.
「兼山樓」「惺心淙」「天冠峰」「花影池」「醒酒石」「洗墨渦」「千枝松」「雙門桐」「夢蜨寮」「觀漁臺」「眞率漏」「嬋娟徑」「花隄」「竹垞」「藥圃」「菜畦」「水碓」「石鐘」「松瓢」「藤杖」「篛笠」「筍鞵」「牧笛」「耘唱」「山君」「仙客」「燕窩」「蜂房」「鷄枏」「犬牢」「讀書」「閱畵」「燒香」「鳴琴」「呼酒」「點茶」「聽瀑」「對雨」「涉園」「行野」「留僧」「過鄰」「洛花」「采樵」「聞鸎」「飯牛」「閣夜」「登山」「勞農」「玩月」「値風」「宴坐」「講道」「懷人」「謝客」25) 外史前編 2, 「兼山樓謾題」.18 韓國漢文學硏究33輯
茆屋偃昻聊自樂北窓時得夢庖犧
우이동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세상에 별다른 근심이 없이 지낼 적에 지은 시이다.
관암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세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 양육된 관암이 이계를 얼마나 따랐을 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바로 그런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이동에와 글과 글씨를 배우던 시절에 지은 시이다.
세상에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이는 이 시에서 관암의삶의 자세가 배어나기도 한다.
「겸산루잡영」은 「겸산루잡영」이라는 제목 하에 각각의 소제목을 붙인총 55수의 오언율시이다
.백운대 아래에 땅을 정하여작은 누각이 속세에 우뚝하다
산과 시내 서로 비쳐 어울리고꽃과 약초 우거져 무성하다
아름다운 경치 계절마다 갖추어 있고
그윽한 정취가 만상에 어렸네겸산은 군자가 본받아야 하니
제자리에 머물러 때에 맞춰 움직여야 하네.
26)卜築白雲下小樓出塕埲溪山相映帶花藥藹鬱蓊佳景四時具幽趣萬象總兼山君子以於止順時動
26) 외사전편 2, 「겸산루잡영」, 「兼山樓」.耳溪家와 牛耳洞19
「겸산루잡영」의
첫 번째인 「겸산루」이다. 먼저 겸산루의 위치에 대하여 말한 다음, 겸산루에서 보이는 승경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계절마다 바뀌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은거하는 취미가 물씬 풍겨난다.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 겸산루라 이름한 이계의 의도를 떠올린다.
따지고 보면, 겸산루의 이름은 周易 의 艮卦와 깊은 관련이 있다.
겸산은 八卦가운데의 艮卦(☶)가 중첩되어 만들어진 64괘 가운데 重山(☶☶)과 같은 뜻을 지닌다.
그래서 관암은 이 시의 말미에서 주역 간괘의 풀이를 제시하였다.
出入動靜을 때맞추어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겸산루라는 이름을 붙인 이계의 속뜻은 정계의 출입에 때를 맞추리라는 결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우이동도 그 시의적절한 출입에 기반이 되는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작은 땅에 네모난 연못 만들어통을 연결하여 시냇물을 끌어 들였네노니는 물고기 자맥질 소리 내면서때때로 물살 타고 퍼덕거리네
봄이 되자 온갖 꽃 향기로운데하나하나
거울 속에 거꾸로 비친 듯가장 사랑하는 것은 꽃 중의 군자저절로 덕을 지녀 곱구나
.27)一畝開方塘連筒灌溪水游鱗發潛響有時乘吹起入春萬花香一一倒鏡裏
27) 외사전편 2, 「겸산루잡영」, 「花影池」.20 韓國漢文學硏究33輯
最愛花君子天然含章媺화영지를 읊은 시이다.
화영지는 관암이 소귀당 앞뜰에 넓이가 半畝정도로 만든 각이 진 연못의 이름이다.
관암은 연미천의 물을 끌어다 대고 못의 가운데에 돌을 쌓아 섬을 만들어 놓고 온갖 꽃을 심어 놓았는데
아침해살과 저녁노을이 비출 적에 꽃이 물에 거꾸로 비치기 때문에 화영지라고 이름하였다고 했다.
28) 시의 전4구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노래하였고후4구에서는
봄이 되자 화영지 주변과 화영지의 안에 심은 꽃들이 활짝피어 향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담았다.
화영지가 하도 맑아 꽃들이 비친 모습이 꼭 거울에 비친 것 같다고 하였다.
관암이 겸산루에서 읊은 시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것은 「겸산루팔영」이다.
「겸산루팔영」은 겸산루에서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묘사한 것으로, 이계에서 한걸음 더 나가 관암이 독자적으로 선정한 것이다.
「兼山樓八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는 수락산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水落朝旭),
둘째는 천관봉에서 달구경하기(天冠新月),
셋째는 삼각산의 기이한 봉우리(三角奇峰),
네 번째는 우이동의 긴 시내(牛耳長川),
다섯 번째는 솔길에서 물소리 듣기(松徑聽濤), 꽃 핀 물가에서 물고기 구경하기(花漵觀魚), 앞산의 복숭아 꽃(前山桃花), 후원의 밤나무 숲(後園栗林) 등이다.
제일 먼저 「水落朝旭」을 보자.
수락산은 겸산루에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방향에 수락산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수락산의 아침 햇살’이라 이름한 것이다.
잠 깬 겸산루엔 산새 소리 재잘재잘
28) 外史前編 4, 「花影池記」.耳溪家와 牛耳洞21
동창으로 언뜻 보니 아침햇살 비치네
두견새 우는 온갖 나무 비단처럼 붉으니문득 봄이 나의 집을 에워쌈을 알겠네.
睡罷兼山山鳥喧東窓忽看射朝暾杜鵑萬樹紅如錦偏覺春光繞我軒
29) 새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산새들이 조잘거리고 있다.
벌써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봄이 온 겸산루엔 두견새가 울어대고 있다.
「겸산루팔영」의
첫 번째 수를 봄날의 아침으로 장식한 것이다.
예쁜 달 동쪽 봉우리에 오르니연꽃이 바다 속에서 솟아나는 듯봄이 오니 앞 개울 물 다시 불고흔들리는 물 금빛으로 출렁거리네
.娟娟新月上東岑疑是蓮花湧海心春來新漲前谿水搖得流光萬點金
30) 두 번째 수인 천관봉에 올라 달구경하는 것을 읊은 시이다.
천관봉은 우이동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도봉산의 줄기에 해당한다.
우뚝하게 솟아있는 모양이 꼭 높은 관을 쓴 도사가 구름을 걷고 단정히 않아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이 시는 겸산루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천관봉에 올라 달이 떠오르는 수면 위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29) 외사전편 2, 「겸산루팔영」, 「水落朝旭」.30) 외사전편 2, 「겸산루팔영」, 「天冠新月」.22 韓國漢文學硏究33輯
둥그런 달이 솟아오르는데시내에는 봄이 와 물이 불었다.
관암은 달빛이 부서지는 눈부신 광경을 포착해내었다.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관암은 우이동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삶의 주변을 탐미적인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발견한 새로운 미적 대상들을 한시의 형식 안에 소담스럽게 담아내었다.
이계에게서 물려받은 구업을 잘 계승하고자 노력한 관암의 산물이다.
4. 결론
이상으로 이계 가문과 우이동에 대하여 대략 그 실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왜 이계와 관암은 우이동의 기록에 이렇게 열정을 기울였던가 ?
이계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사의당을 다시 찾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우이동을 자기 가문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경주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유하게 된 우이동에 대한 이계의 관심과 애정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조상의 무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풍산 홍씨의 소유가 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유권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이동에 별장을 경영하면서 우이동의 승경을 발굴하고 이에 대한 기록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관암은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계를 의지해 성장하였다.
이계는 관암에게 있어 아버지와 스승의 역할을 겸한 인물이다.
관암 문집에서 보이는 우이동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이계를 모시고 생활하던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이계가 서거한 후 정리한 것이다. 이는 외사전편 이 관암의 과거급제 이전의 기록이라는 추정에 따른 것이다.
耳溪家와 牛耳洞23
관암은 우이동에서 이계를 모시고 생활하던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한 바 있다.
그리고 관암은 평생 이계의 기업을 잇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가운데의 하나가 우이동에 관련한 저술이다.
어렵게 소유하게 된 우이동을 가업으로 남기기 위해 체계적인 기록을 남겼다고 여겨진다.
관암의 문집 곳곳에 남겨진 이계에 대한 추억을 보면,
관암은 언제나 이계의 기업을 제대로 잇고 있지 못하였음을 탄식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약 200여년 전에 이계와 관암이 남긴 이러한 기록들이 오늘날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무엇일까?
본론에서도 보았듯이 지금의 우리가 우이동을 대상으로 한 관암의 시를 감상하면서 관암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관암 시대의 우이동과 현재의 우이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잠시 빌려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후손들에게 보다 아름다운 환경을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200년 전 이계와 관암의 우이동 관련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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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홍경모, 外史前編 , 규장각.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洞名沿革攷 Ⅸ(도봉구편),
1984.이군선, 「관암 홍경모의 시문과 그 성격」,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이종묵, 「홍양호와 삼각산 우이동」, 문헌과 해석 24호, 문헌과해석사,
2003.진재교, 이계홍양호 문학 연구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9.24 韓國漢文學硏究33輯
AbstractYigye-ga(耳溪家) and Wooyi-dong(牛耳洞)31)Lee Goon Seon*Wooyi-dong was reverted to Pungsan Hong’s family by Yigye HongYang-ho. After Yigy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he tried to ownWooyi-dong which his ancestors’ tombs were. At last Wooyi-dongchanged ownership from Duksoo Yi’s family to Pungsan Hong’sfamily. He found scenic spots of Wooyi-dong and put them on recordmanaging a cottage in Wooyi-dong. Gwanam, who took over fromYigye, left more systemantic work about Wooyi-dong, and he alsofound beauty spots.What is the modern meaning of these documents that Yigye andGwanam tried to decorate beauty of Wooyi-dong about two hundredyears ago? When we appreciate Gwanam’s poems about Wooyi-dong,we cannot help depending on Gwanam’s record. The reason is whyWooyi-dong now changed as much as we cannot imagine in comparisonwith it in his days. There are a lot of differences between his attitude,* Toegye Research Institute, Kyungpook University耳溪家와 牛耳洞25which made his space with ancestors’ breathing recognized beautifullyand decorated, and modern thoughtless development. This land isn’t ourown things forever and ever. If we perceive that we have borrowed andlived here, we can leave more beautiful environment to our descendants.This is the precept that, about two hundred years ago, Yigye andGwanam’s documents related to Wooyi-dong gives us, I guess.Key words : Wooyi-dong(牛耳洞), Gyumsanru(兼山樓), a cottage inWooyi-dong, Wooyigugok(牛耳九曲), Sogwidang(小歸堂), Wooyidongji(牛耳洞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