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고개 홍경모家 저택 '사의당' 면모 드러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체 높은 조선 사대부들은 관직 생활을 끝내면 대체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안동으로 낙향해 도산서원을 세운 퇴계 이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귀거래(歸去來)의 풍경은 17세기 무렵으로 들어서면 급속히 변모한다. 귀거래하는 지역이 영호남이나 충청도가 아니라 도성 근교에다가 그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들이 살아갈 곳으로 대규모 저택을 다투어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의 충무로2가 중국대사관 뒤 언덕길을 진고개(泥峴)라 하는데 이곳에도 '사의당'(四宜堂)이라는 풍산홍씨 가문의 대저택 한 채가 있었다.
사의당은 연원이 매우 깊지만, 홍씨 가문으로만 보면 인조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한 홍주원(洪柱元)에서 출발해 홍만회(洪萬恢), 홍중성(洪重聖), 홍진보(洪鎭輔), 홍양호(洪良浩), 홍낙원(洪樂源)을 거쳐 홍경모(洪敬謨.1774 -1851)에 이른다.
7대 약 150년의 역사를 축적한 사의당은 홍경모 시대에는 어떤 면모였을까?
이곳에는 전체 100칸이나 되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는 1칸 온돌방인 수약당(守約堂), 북쪽에는 온돌 2칸, 대청마루 1칸인 북하당(北下堂), 동편 뒤쪽에는 후당(後堂) 등의 부속 건물채가 있었다.
이 외에도 5개 들보가 있는 11칸 건물에 온돌이 3칸, 대청마루가 4칸인 사의당이 있었다.
사의당은 저택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정당보다는 사의당이 중심 건물인 까닭인지 그 안팎은 면모가 다른 곳보다 더욱 화려했다. 정원 계단에는 나무를 많이 심고 기암괴석들로 인공산을 꾸미기도 했다. 이런 괴석 중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태호석(汰湖石)이란 돌도 있었다.
바깥만큼이나 사의당 안쪽은 더 화려했다.
이곳에는 홍경모의 조부 홍양호가 장만한 막대한 골동품이 있었다. 이 무렵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는 금석문 열풍이 일어 한국과 고대 중국의 비석 탁본이 그득했으며, 조선의 역대 명가 글씨첩도 갖췄다. 그림도 여러 점 걸렸다.
놀랍게도 서양에서 들어온 천문관측을 겸한 자명종도 있었다. 문방구로는 자단(紫檀)이란 최고급 목재로 만든 벼루를 넣어 두는 3층짜리 가구도 있고, 군자배와 유리배라는 최고급 술잔도 갖췄다. 일본에서 수입한 청동제 불상도 비치했고, 중국인이 만든 백우선(白羽扇)이란 부채도 있었다.
그의 골동품 목록에서 더욱 경이로운 대목은 고고 출토품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1777년 홍양호가 경흥부사로 재작할 때 구한 숙신(肅愼)의 돌도끼와 오국성(五國城) 인근 이른바 황제총이란 무덤에 딸린 작은 무덤에서 출토됐다는 송나라 시대 동전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말하자면 사의당은 사설 박물관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약 200년 전 사의당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자세히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홍경모가 자기 저택의 내력을 자세히 정리한 '사의당지'(四宜堂志)라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한국 한문학 전공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이종묵 교수는 최근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호로 발간된 우리한문학회 기관학술지 '한문학보' 제19집에 기고한 '조선후기 경화세족의 주거문화와 사의당'이란 논문에서 '사의당지'를 중심으로 18-19세기 서울의 사대부 주거문화를 복원하고자 했다.
이 교수는 "이 사의당지야말로 조선후기 주거공간의 건축과 조경, 그리고 인테리어를 종합적으로 기록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에서 드러난 주거 양태가 비단 홍양모 집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문거족이라 일컫는 사대부에는 모두 해당되는 현상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