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풍산홍씨 [0] 홍기천 일반 2019-01-29 (화) 21:22 인쇄 스크랩 ㆍ 분 류 : 일반 ㆍ 첨부#1 : eca084ecb2b4ed919ceca780.jpg (73KB) (Down:0) 총부에서 풍녕의 당숙을 모시고 있는데 함께 숙직하던 형도 옥당(홍문관)에서 와서 솥발처럼 모여 앉아 밤에 이야기하다摠府培豊寧堂叔同直之兄亦自玉堂來會鼎坐夜話(총부배풍녕당숙동직지형역자옥당래회정야화)其一(첫번째 시)宿衛鉤陳密 (숙위구진밀) 숙위에는 구진이 친밀하고(궁궐의 숙직에서는 임금의 근위군과 친밀 하고)官銜玉署廳 (관함옥서청) 관함에는 옥서가 맑도다 (옥당 즉 홍문관에서 관함직이 맑다)三人二省並 (삼인이성병) 세 사람이 두 성에 나란이 있으니(세 사람이 2개 부서에서 근무)千載一家榮 (천재일가영) 오랫동안 한 집안의 영광이로다漏促知宵盡 (루촉지소진) 자격루가 재촉하니 밤이 다한 줄 알겠고庭虛得月明 (정허득월명) 뜰이 텅 비니 달이 밝은 줄 알곘네相携不盡與 (상휴불진여) 서로 이끌며 흥을 다하지 못하니只怕報壺傾 (지파보호경) 다만 술병이 비었다고 아뢸까 두렵다其二(두번째 시)尺五蓬萊殿 (척오봉래전) 매우 가까운 곳에 봉래전이 있고祥雲接太淸 (상운접태청) 상서로운 구름은 태청에 접 하였네誰言禁直苦 (수언금직고) 누가 말 했던가 ? 숙직이 괴롭다고已極布衣榮 (이극포의영) 포의로서의 영광이 극에 달 했네坐久身忌倦 (좌구신기권) 오래 앉아 있자니 몸은 피곤하여지고詩成眼却明 (시성안각명) 시가 이루어지니 눈은 도리어 맑네開窓看夜色 (개창간야색) 창을 열고 밤빛을 바라 보노라니落月已西傾 (낙월이서경) 지는 달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네 무하당(영안위 홍주원의) 시문집에서풍산홍씨 습지공계 풍녕군파시조이신 풍녕군께서 도총관으로 계실때(1630년경으로추정)영안위와 그의 4촌형(지계공파 洪柱一 : 영안위 에게는 유일한 형님 이심)과 세분이 궁성에서 숙직을 하시면서 영광스러운 풍산홍씨를 생각하시며 지은 시로 간주됩니다(궁성 숙직에 세분의 숙질이 함께 하셨다는것은 어느 성씨 에서도 흔치않은 일 일것입니다)홍보(洪寶) 풍녕군(豊寧君) 1585(선조 18)∼1643(인조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시(汝時), 호는 월봉(月峰). 형조좌랑 난상(鸞祥)의 아들이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금화사별좌(禁火司別坐)·한성부참군을 지내다 1615년 부친상으로 사직하였으며, 그뒤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면천으로 낙향하였다.1623년 인조반정 후 그해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수찬·장령 등을 역임하고 원주목사가 되었다.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고찬(高瓚)·고계립(高繼立)·고대립(高大立) 등이 대북파의 유효립(柳孝立) 등과 은밀히 교통하여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고, 조정이 오랑캐와 화해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죄인들의 목을 베러 직접 경성(京城)으로 간다 하고 스스로 창의(倡義)를 내걸어 이인거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으로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이 반란은 진극일(陳克一)에 의하여 보고되었고, 이인거 등이 횡성 등지의 군기(軍器)를 탈취하여 거병(擧兵)하자, 그는 원주에서 이인거를 기습하여 체포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부호군이 되고, 이어 소무공신(昭武功臣) 등에 녹훈되어 풍녕군(豊寧君)에 봉하여졌다.1632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38년에는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형조판서가 되었다.이때 3공6경(三公六卿)들은 모두 자제를 인질로 보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질자(質子)를 보내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아 한때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유배되기도 하였다. 벼슬은 좌참찬에까지 이르렀고, 호란 때에는 강화도에 들어가 수릉관(守陵官)을 지냈으며, 청나라에 들어가 군대징발 요청에 대한 나라 사정을 진술하기도 하였다.저서로 《월봉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경헌(景憲)이다..홍주일(洪柱一)11604(선조 37)∼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일지(一之), 호는 현당(玄塘). 대사헌 방(滂)의 아들이다.1626년(인조 4) 성균관의 재임(齋任)으로 지목되어 한때 정거(停擧)되었다.1630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지평·직강을 거쳐, 1637년 배천군수를 지냈다.그뒤 해운판관·여주목사를 역임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남원부사로 부임하였다.홍 주원(洪柱元)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건중(建中), 호는 무하당(無何堂). 부사직(副司直) 홍수(洪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홍영(洪靈)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딸이다. 외할아버지와 김류(金瑬)로부터 수학하였다.1623년(인조 1) 선조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하여졌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우의정 신흠(申欽),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 등과 함께 인목대비와 인렬왕후1629년 인조(仁祖)가 인목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홍주원의 부친인 홍영의 벼슬을 예조참판에 제수하였고 1631년 인목대비의 건강이 좋지 않자 인조 1647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시헌력(時憲曆)을 구입해서 귀국, 새로운 역법의 시행을 건의하였다.1649년(효종 즉위년)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1653년 사은사로, 1661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각각 청나라를 다녀왔다.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또한, 문학을 즐기고 선비들과 명승지를 찾아 놀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조석윤(趙錫胤)·박장원(朴長遠)과의 우정이 깊었다. 저서로는 『무하당집(無何堂集)』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