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諱) : 홍민위(洪民緯)
파(派) : 취옹공파(醉翁公派) 파시조
생(生) : 1562년
졸(卒) : 1618년
자(字) : 여륜(汝綸)
호(號) : 취옹(醉翁)
부(父) : 징(澄)
배(配) : 이천서씨
과거 및 취재 : 선조(宣祖) 21년 (1588)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관직(官職) : 생원(生員)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
문헌(文獻) :
묘(墓) : 나주 다도면 신동리
어려서부터 뜻을 세워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주력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경전과 성리서(性利書)를 깊이 탐구했으며, 관혼상제의 예법이나 종통을 중시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는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뜻을 따랐다.
절목(節目)을 다듬어 〈가훈서(家訓書)〉를 만들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아들 조카와 더불어 독법례(讀法禮)를 거행하니, 마치 한훤당(寒暄堂)의 고사와 같았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과거에 뜻을 두어 선조21년(1588) 26세의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대학관(大學館)에서 고명들과 종유(從遊)함에 정승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공을 대유(大儒)로 칭송하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 공의 문장을 인정했다고 한다.
선조26년(1593) 나주목사 박광옥(朴光玉)의 격문을 보고 가재를 털고 군량미를 모집하여 의병총지청(義兵總治廳임)에 찾아가 원조하였으며, 각 읍 유식사림(有識士林)들과 란국대책(亂局對策)을 상의, 계책을 웅변하였다.
또한 형 민성을 따라 지석강(砥石江) 작전에 참가하여 왜적을 참살하는데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뒤에 학교가 허물어지자 교궁(校宮 향교)을 중수하고 양사재(養士齋) 설치를 주창하여 유학을 진흥시킨 공을 세웠다.
광해9년(1617)에 광해군이 모후를 유폐시키자 상소하여-글은 없어져 전해오지 않음-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종신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시와 술을 벗 삼아 스스로 취옹(醉翁)이라 불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종(大宗 대종가의 계통)의 법도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이나 주자(朱子)의 종통을 중시하는 의리는 이미 정론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지만 매사를 반드시 종가에 아뢴 뒤에 행해왔다. 내 자손도 또한 이 뜻을 본받아서 선대의 묘소나 집이나 집기들은 반드시 종손이 주장해야하며, 재산과 곡식에 대해서도 혹 잉여분이 있으면 골고루 나누어주어 돈독한 화목을 펴도록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였다.
광해10년(1618) 에 집에서 졸하니 남평현 도천면 동마동(銅馬洞)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유인(孺人) 이천서씨이고 부친은 별좌(別坐)를 지낸 정후(廷厚)이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진주성 전투에서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다.
취옹공이 유언으로 외손 봉사를 명하여 유구히 보살피도록 했다.
공의 묘소 아래에 장사지내고 별좌 부인의 묘소를 왼쪽에 합장하였다.
별좌공의 호는 송촌(松村)이니 효행으로 천거되어 별좌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떠날 때에 취옹공에게 《大學》을 주면서 "이 책에 지행(知行: 지식과 행위) 공부가 들어있다."라 말하고, 또한 뒷일을 부탁하기를, "그대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계사년에 진주성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공이 〈김건재의 시를 차운하다〔次金健齋韻〕〉를 지었는데, "한가로운 거처엔 속된 선비 드무니〔處獨居閒俗士稀〕 풍월을 불러 산문(山門)을 둘렀을 뿐〔只呼風月繞巖扉〕 주인은 지금 무슨 일을 즐기는가〔主翁所樂今何事〕 청산에 사조요 위수의 강태공이라.〔謝眺靑山渭叟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