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홍씨 인터넷 족보 발간에 부쳐
아! 우리 풍산 홍씨가 우리나라의 저명한 성씨 중 하나임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조인 홍지경(洪之慶)은 고려시대인 1242년(고종 29)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하였다. 돌아가신 후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신성포 오산당에 모셔져 그 후손들이 풍산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졌다. 2세인 홍간(洪侃)은 고려시대 문장 12대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어 세상에서 홍애선생(洪崖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당대의 정포(鄭誧)는 “당일에 홍평보(홍간)는 붓끝에서 파란이 일었다지.”라고 하고, 이제현(李齊賢)은 “홍평보[간]는 시 한 편을 지어 내놓을 때마다 현우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전한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인 『홍애집(洪崖集)』이 세상에 전한다. 이후 3세 홍유와 4세 홍연, 홍준 등도 모두 대제학에 올라 학문적 전통을 확립하였습니다. 한편 고려 말기 왕조의 쇠퇴와 함께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려 할 때, 5세 홍구(洪龜)는 낭장의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고양시 고봉산 자락으로 은둔하여 관향인 풍산에서 본격적으로 이거의 시대를 열었다. 이때부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우리 풍산 홍씨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10세인 홍이상(洪履祥)이 출사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벼슬이 높아지고 가문도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풍산 홍씨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다. 홍이상은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입격한 후 6년 뒤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는 영예를 받았다. 이후 지평,이조정랑 등을 거쳐 어필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다시 병조참의, 대사간 등을 거쳐 1594년에는 성절사로 중국 사행을 다녀와 좌승지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 내직으로는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등을 외직으로는 안동부사, 청주목사, 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홍이상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이정귀가 쓴 신도비명과 이항복이 지은 묘갈명에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새롭게 열린 풍산 홍씨의 영화는 이후 왕실과의 국혼(國婚)을 통해서 우리 풍산 홍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리게 된다.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洪柱元),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와 원빈 홍씨, 숙선옹주와 영명위 홍현주(洪顯周) 등이다. 더구나 세상의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홍국영은 정조 대에 최고의 권세를 잡기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풍산홍씨는 조선 중기에 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136명의 문과 급제자와 92명의 무과 급제자가 나왔으며, 이중에는 호당(湖堂) 9명, 문형(文衡) 9명, 청백리(淸白吏) 6명, 정승 5명, 봉조하 6명 등 수많은 중요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특히 영·정조대에는 홍인한, 홍용한, 홍상한, 홍낙성, 홍양호 등 정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고, 궁궐의 중심에는 혜경궁 홍씨가 질곡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 더구나 혜경궁 홍씨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을 기록한 『한중록(閑中錄)』은 우리의 조선시대 정치사와 문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이다. 이러한 기록 정신은 규방(閨房)인 혜경궁 홍씨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저술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중 몽헌 홍만종, 이계 홍양호, 연천 홍석주 등은 비단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그 이름이 높다.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 『명엽지해(蓂葉志諧)』,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해동이적(海東異蹟)』, 『소화시평(小華詩評)』, 『시화총림(詩話叢林)』 등, 홍양호의 『이계집(耳溪集)』, 『육서경위(六書經緯)』, 『만물원시(萬物原始)』,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삭방습유(朔方拾遺)』, 『북새기략(北塞記略)』 등, 홍석주의 『연천집(淵泉集)』, 『학해(學海)』,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 『동사세가(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마방통휘(麻方統彙)』, 『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의 저술은 우리나라의 기록문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풍산 홍씨의 영광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도인 홍유한, 금산 군수로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 홍범식,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홍진, 민족운동가이자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 그리고 그의 아들은 국어학자 홍기문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풍산 홍씨는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산 홍씨의 영화는 한때의 과거로만 회자될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해지고 공동보다는 개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로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 가문이라는 공동체 사회가 붕괴되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 사회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결코 혼자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가문은 매우 중요한 버팀목이자 동기이다. 조선시대에 비하면 우리 풍산 홍씨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만큼의 친연성은 오히려 더 감소되고 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아마도 우리가 갖고 있는 가문 그리고 조상에 대한 의식이 매우 낮아졌다는 의미로 읽힌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일 수 없다. 부모가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으며, 풍산 홍씨의 같은 종족으로서의 유대감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풍산 홍씨는 이러한 사회일수록 반대로 가문의 공동체 의식과 유대감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작업이 족보의 발간이다.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으로 정의된다. 족보의 시초는 중국에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그러한 원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같은 성씨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널리 제작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풍산 홍씨의 경우도 지속적으로 족보 발간을 통해 종계의식을 강화하였다. 만퇴당께서 최초로 간행하신 1709년「기축보」를 필두로, 1767년「정해수보」, 1932년「임신보」, 1962년「임인보」, 1985년「을축보」, 2008년「무자보」등 전후 6회에 걸쳐 대동보를 발간한 바 있으며 금번 일곱번째로 족보를 구축하는것이다. 족보의 발간은 단순히 책자의 발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하여 제작하는 것이다. 다만, 현대사회는 기존의 책의 형태인 족보로는 많은 요구들을 담아내기가 어렵다. 현재 족보 보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그러한 일면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맞게 우리 풍산 홍씨는 인터넷 족보를 발간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터넷 족보는 이미 타 성씨에서 많이 이루어져 효율성이 입증되었다. 이제 우리 풍산 홍씨도 인터넷 족보를 통해 본질은 변하지 않고 형식을 바꾼 형태로 상호 가문의 결속력을 다질 필요가 있다. 인터넷 족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언제든지 검색을 통해 나의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의 조상은 누구였는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보학(譜學)이다. 조선시대와 같은 용어와 한자를 모른다해도 쉬운 형태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족보가 우리와 가까이 있으면서 접근성이 좋아야 우리 후손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춧돌을 놓는 심정으로 우리의 모든 종원들의 동참을 요청드린다. 한 명의 누락도 없이 풍산 홍씨의 모든 종원들이 기재될 수 있도록 완벽한 인터넷 족보의 발간을 희망한다. 그것이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크고 훌륭한 가치임이 분명하다.
2025년 7월 28일
풍산홍씨대종회 총무이사 겸 남원공파 정익공문중
회장 晩田 홍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