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선생(1726-1785)은 조선시대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였습니다. 선생은 영주 순흥지방에서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열심히 천주교 신자다운 생활을 실천했던 분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에 심취하였고, 『칠극』이 제시하는 신앙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매 7일마다 하루씩 축일을 지내고 금요일마다 단식재를 실천하였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정결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삶은 아직 천주교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놀랍고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안동교구는 25주년 기념 교육관을 세우면서 홍유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 그분의 삶이 두루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련원 이름으로 그분의 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수덕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 생애와 구구리 은거지 및 우곡 유택
출생 - 풍산 홍씨 홍유한(洪儒漢)은 아버지 홍창보(洪昌輔)와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에게서 1726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랑(士郞) 호가 농은(隴隱)이다.
가계 - 조부 중명(重明)은 효행이 뛰어나 숙종 때 정려되었고 영조 때는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되었다. 중명은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고 그로 인해 병을 얻어 1686년 32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 창보는, 문중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주실의」,「칠극」,「직방외기」등을 읽고 연구하여 수계생활하기를 원했으므로 문중과 주위의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홍유한은 16세 때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성호선생은 “홍군은 입지의 확고함과 공부의 독실함이 아무리 옛사람이라도 견줄만한 이가 드물다”고 그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성호선생의 제자들 가운데는 안정복, 채제공, 이기양, 이가환, 권철신, 이용휴 등이 있었는데, 홍유한은 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호선생이 아버지 홍창보에게 보낸 편지에는 홍유한의 병세를 몹시 걱정하는 것이 있다. “아드님의 병세에 처음엔 심히 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지금은 잠잘 때 흘리는 도간이 비록 그쳤으나 여증이 남아 있어 오농조삽함이 모두다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은 그에게 산수에 유유하면서 마음에 울결된 두려움을 활짝 풀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계획이라고 권합니다”. 결국 홍유한은 23세 때 몹쓸 병에 걸려 4년 동안이나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홍휴한은 젊을 때 건강이 몹시 나빴던 모양이다.
마침내 홍유한은 산 속에 기거하면서 치료와 휴양을 하기 위하여 서울의 집을 팔아 친척들이 살고 있는 충청도 예산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천주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는 한편 자신의 호를 농은( -논두렁 농 隱-숨을 은)이라 하고 18년 동안 조용히 천주교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예산은 경기지방과 가까워 찾아드는 이들이 많았고 은둔생활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번거로웠기 때문에 1775년 드디어 영남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소백산 아래 순흥 단산 구구리(배나무실)로 이사를 하였다. 그가 구구리로 이사할 때 정산 이병휴는 이렇게 송사를 지었다. “영남은 퇴도자이자께서 정학을 일으켜 여러 사람을 인도하고 교화시켜 순미하여 늙으면 편하고 붕우간엔 미더워 배율과 영송의 위의가 성하여 나의 계부 성호선생이 살집을 얻어 그곳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평소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어 지금부터 선생의 도가 벗을 통하여 점차 영남에 행해질 것이다.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한편 권철신도 홍유한이 영남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우리 무리 몇 사람이 당초에 약속했던 일 가운데 서로 손을 마주잡고 함께 하자던 계획이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그르치게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컨대 실로 내가 그렇게 되도록 떠밀어 넣은 것 같으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습니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이쪽의 여러 가지 사정은 자야가 자세히 알고 돌아가니 어찌 반드시 번거로이 말씀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이만 줄이겠습니다. 살펴 헤아리길 바라겠습니다. 갑진양원(1784. 11. 29) 하생 복인 권철신”. 위의 편지에서 권철신, 이기양 등 뜻 있는 학자들은 유교의 원류인 안향을 배향한 소수서원이 있고 퇴계의 도산서원이 있는 이곳 영남 지방에서 함께 살며 새로운 학문을 일으키고자 했던 듯 싶다. 후에 1779년 천진암 주어사를 중심으로 천주교 강학회가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함께 약조했던 계획이란 바로 그런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홍유한은 천진암 강학회보다 4년이나 앞서서 이곳 순흥에서 1775년부터 「천주실의」, 「칠극」에 따른 천주교 수계생활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홍유한은 구구리에서 축일표나 기도서도 없이 7일마다 축일, 곧 주일이 온다는 것만 알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 경건한 마음으로 일을 쉬고 세속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금육절의 자세한 규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샤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의 수덕생활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홍유한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백산으로 들어가 13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 그는 예산에서 죽었는데 아마 화세(火洗) 밖에는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홍유한은 1785년 3월 10일,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일시 가묘했다가 5월 27일 궁중 풍수가 잡아준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의 문수산 중턱에 묻혔다. 달레의 천주교회사에는 그가 예산에서 죽어 그곳에 묻힌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구리에서 죽었고 우곡에 묻혔다. 선생의 후손들은 홍유한의 묘소를 알고 있었는데 1995년 3월 8일, 봉화본당 교우들과 후손 홍관희씨가 묘지에 도리석을 쌓고 비석을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그때 묘 위 부분의 흙을 팠는데 석회를 섞은 흙으로 관이 덮혀 있고 숯가루로 쓴 ‘산림처사홍공지묘’(山林處士洪公之墓)라는 글씨가 발견되었다. 그동안 한국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비로소 밝혀지게 된 것이다.
한편 홍유한 선생이 죽자 권철신과 홍낙민은 제문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 제문은 홍유한의 사람 됨됨이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문헌이 되고 있다. 제문에서 지적하는 검약한 삶, 음식과 여색의 절제는 당시 천주교의 강조 덕목이었다. 또한 가난하고 늙고 병든 이들, 나그네를 따뜻이 돌보았다는 그의 행적은 홍유한이 천주교에서 권고하는 여러 가지 덕행들을 적극적으로 실천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봉화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춘양 방면으로 10km쯤 가면 ‘다덕 약수터’에 이르고, 이곳에서(성지 안내 표지판) 좌측으로 6km쯤 문수산을 향해가면 우곡 성지에 다다른다. 지금은 도로포장 공사가 마무리되어 성지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이곳은 안동교구가 묘지가 있는 산 5정보, 산 아래 계곡 3정보를 매입하여 청소년 야영장으로 활용하고 있고 현재 성지담당 사제관, ‘우곡 홍유한 피정의 집’(054-673-4152)과 성당이 마련되어 있다. 약 3-40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시설이다. 홍유한의 묘소는 문수산으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있고, 가히 좌청룡우백호의 명당자리에 놓여있다는 것을 굳이 풍수설을 모르는 이라도 대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묘지에는 1995년 가을에 봉화본당 신자들이 둘레석과 상석, 비석과 제대를 설치하였다. 선생의 묘소 앞에 서면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로 천주교 신앙인의 삶을 기꺼이 살았던 한 선배 신앙인의 삶을 생각하게 되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것은 신앙인으로 회심하고도 계율을 짐스럽게 여기는 우리의 형태와 견주어 볼 때 선생의 삶은 훌륭한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홍유한은 학문의 고향인 영남지방에 와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및 여러곳을 다니며 한가롭고 여유있는 자연과 함께 살면서 여러편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그의 신앙의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시를 한 구절 옮겨본다.
“하늘이 나를 살핀다.
공경하고 공경할 지어다.
천도가 매우 밝느니라.
천명을 보존하기가 쉽지 않으니
높이높이 있다 이르지 말라.
그 땅에 으르내려서
날로 살펴 여기에 계시느니라”.
<홍유한 선생의 묘지 개축 및 제대 묘비 건립>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배나무실). 홍유한 선생 은거지는 영주에서 북쪽으로 소수서원 방향으로 6km쯤 가다가 동촌 갈림길에서 단산방면으로 4km쯤 가서 오른쪽으로(이곳에 성지 안내 표시가 있다) 다리를 건너 구고초등학교를 지나 2.5km쯤 가면 다다른다. 홍유한은 1775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1785년 죽기까지 10년 간을 이 집에서 살았다. 홍살문으로 장식된 대문채는 문설주 위로 바깥쪽에는 “증통선랑사헌부지평홍중명지문” 안쪽에는 “일효자학생홍중명지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집 건물은 본래 ㄱ자형의 상채(현재 남아있는 건물)에 방, 마루, 부엌, 창고가 있었고, ―자형의 사랑채(현재 비석이 서 있는 곳에 있었으나 없어짐)에는 방, 마루, 부엌, 마구간이 있었다고 한다. 홍유한 선생이 살 때는 초가로 지은 집이었으나 후에 구운 기와를 올렸고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바뀌었고 벽체 또한 시멘트 몰탈을 덧씌워서 본래의 모습이 없어지고 말았다. 구운 기와는 집 뒤편에 차곡차곡 쌓아서 담벼락을 만들어 놓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1995년에 세운 “한국최초의수덕자농은홍유한”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현재는 볼품 없는 이 집이 언젠가 원래대로 복원되고 없어진 아래채도 다시 들어서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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